인문학은 나,너,우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입니다. 철학 역사 사회 경제 정치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20분 동안 하나씩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저는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국가론 소개와 비판의 비중이 거의 절반 정도로 섞이게 된 것 같습니다. 포퍼는 플라톤이 정의justice를 각자의 분수를 지키는 것으로 정의define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고 지적했죠. 저는 포퍼의 비판이 옳다고 보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시를 폄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신데, 이온ion과 파이드로스phaidros를 보면 플라톤이 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명확합니다. 플라톤은 시짓기가 시인들의 영감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며, 이성적 사고와는 동떨어진 행위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했죠. 시가 주는 감정적 영향은 인간의 이성활동을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는 언어의 명확한 개념을 다루지 않습니다. 언어의 중의적 측면과 다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시이죠.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따른다면 시가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간의 끊임없는 대화다. - E.H.Carr- 이미 검증이 끝난 사료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료를 기록했던 역사가가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되묻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료는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기록된 역사는 이미 해석된 역사입니다. 그것을 읽는 우리는, 한번 해석된 역사를 다시 해석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죠. 사료를 검증한 다음, 우리는 해당 사료를 기록한 역사가의 역사의식에 대해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은 역사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할 것인가를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역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가의 역사의식에 맹목적으로 뒤따르게 될 뿐입니다.
얘거의 해석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모순점을 최대한 해소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얘거의 해석을 정해(正解)로 보고 풀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은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다루는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神學)이 양존합니다. 이 둘 간의 모순이 있다는 것은 얘거를 비롯하여 뒤링, 모저, 멜란 등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신학에 관련된 부분을 전기철학으로 보면 범주론, 논리학과의 모순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그러한 학설을 택했습니다. 그 반대의 학설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코플스톤의 서적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코플스톤은 플라톤의 신학이 더 정교하다는 이유 하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플라톤보다 열등하다고 결론짓습니다. 그 결론에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입문 정보만 제공해드리는 것이 목적이니, 앞으로도 설명의 정교함과 이해가능성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에는 이해가능성을 우선할 생각입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잘못 인용한 부분이 있어서 내용 붙입니다. 나이키 사명선언문은 '운동선수들에게 영감과 혁신을 준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