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세기에 벌써 합스부르크가문은 이 자리에 별장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별장은 1683 년 제 2차 오스만 터어키군의 침략 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오스만 터어키를 물리친 후 황제 레오폴트 1 세는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가 요한 베언하르트 피셔 폰 에어라흐에게 사냥궁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쉔브룬을 공식 여름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궁정 건축가 니콜라우스 파카씨로 하여금 로코로 양식으로 개축하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1500 명이 넘는 궁정 신하들과 여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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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에서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친위병들이 황제의 거처로 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에 보시는 대로 이 궁전은 세라믹 난로로 난방을 하였습니다. 황제 가족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리고 방에 일체의 그을음이 묻지 않도록 궁전 내의 모든 난로들을 방 뒤쪽에 연결되어 있는 난방복도에서(원래 장작으로) 불을 지펴 사용했습니다. 19 세기부터는 열풍난방장치를 장착하였다가 1992 년부터는 더 이상 가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방은 프란츠 요셉 황제를 알현하려는 손님들의 대기실로 쓰였습니다. 황제는 일 주일에 두번씩 사람들을 접견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시간보내기 용으로 사용했던 이 당구대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조부의 것이었는데 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프란츠 2 세로, 오스트리아 황제로는 프란츠 1 세로 불리는 황제입니다. 벽에 큰 그림 3 개가 있습니다. 중간 것은 1758 년에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되는 광경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창설한 이 훈장은 황정의 첫 공훈 훈장이며 황실에서 수여하는 최고 훈장 중 하나로 꼽힙니다. 좌우의 그림들은 훈장 창설 100 주년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 프란츠 요셉 황제는 당시 대 갤러리에서 호화 연회를 베풀었고 궁전 정원에서 리셉션을 열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방의 이름은 금박장식과 콘솔 테이블과 더불어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오리지널 로코코 장식에 속하는 값비싼 호두나무판들에서 따온 것입니다. 샹들리에는 19 세기 것입니다. 이 방에서 프란츠 요셉 황제는 사람들을 접견했습니다. 훈장수여에 감사하기 위해, 청원하기 위해, 혹은 공직에 오른 뒤 인사하기 위해 사람들은 황제에게 왔습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전에 100 명까지도 접견하였습니다. 황제의 탁월한 기억력은 유명했습니다 – 그는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을 절대 잊어버리는 적이 없었습니다.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끝내는 접견은 보통 2,3 분 정도 걸렸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프란츠 요셉은 18 세에 오스트리아 제위에 올랐습니다. 황제는 매일 엄청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 그의 일과는 새벽 5 시 이전에 시작되었고 그 하루를 오른쪽에 보시는 자신의 책상에서 보냈습니다; 이 책상에서 그는 서류를 검토하였고, 아침과 점심식사도 여기로 가져 오게 했습니다. 자신이 지배하는 국가의 제 1 관리의 생활이 주로 이 책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황제는 자신의 화려한 방들에 일체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의 사적인 그림이나 사진들, 그리고 아이들과 손자들의 선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두 개의 큰 초상화 중 하나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33 세 때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시시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며 신화적인 인물로 된 엘리자벳 황비입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황제의 일과는 이 침실에서 시작하여 정확히 짜여진 일정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새벽 4 시에 일어나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였고, 침대 왼쪽에 있는 기도대에서 독실한 카톨릭 신자답게 아침 기도를 올렸습니다. 철침대는 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검소하고 스파르타식이었던 생활일면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침대에서 황제는 1차 대전이 한창 치열하던 1916 년에 68년간의 제국통치를 끝으로 86 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젤 위의 그림은 임종한 황제의 모습입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그의 기나긴 인생동안 많은 운명의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첫 딸 소피가 2 살에 죽었고, 황제의 동생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가 되었다가 혁명가들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이어 외아들 루돌프가 비참하게 자살하였고, 엘리자벳 황비는 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손에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방의 출구 왼쪽에 황제의 화장실이 있습니다. 이 화장실은 1899 년에 프란츠 요셉을 위해 „영국식“ 으로 만들어 넣은 것입니다. 이어지는 세 개의 작은 방들은 엘리자벳 황비가 사용하던 방들입니다. 서재로 사용했던 계단 위 복도 별실에서 황비는 많은 편지들과 일기, 그리고 시를 썼습니다. 이 별실에서 작은 나선형 계단을 통해 1 층으로 내려 가면 황비의 개인거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나선형 계단은 황정이 끝난 뒤 제거되었습니다. 화장방은 황비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던 곳입니다. 엘리자벳은 그 시대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자신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가꾸고 운동하는 것이 황비의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녀는 바닥까지 내려 오는 길고 화려한 머리카락을 손질하느라 하루에 몇 시간씩 보냈습니다. 이제 이 방들을 통과하여 9번방으로 들어 가십시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벳 황비의 부부 침실입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1854 년, 프란츠 요셉은 막 16 세가 된 자신의 사촌 엘리자벳과 결혼했습니다. 이 방은 그 결혼을 계기로 만들어진 부부 침실입니다. 프란츠 요셉은 평생 자신의 부인을 숭배했습니다 – 부인 역시 황제에 대해 같은 애정으로 화답했는지는 묻지 않기로 합니다. 엘리자벳은 처음부터 경직된 궁정생활을 거부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자의식을 갖춘 여성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녀는 독자적인 생활을 하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녔으며 비인에는 지극히 드물게 머무르곤 했습니다. 1898 년 9 월, 엘리자벳은 61 세의 나이로 제네바에서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의 줄칼에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엘리자벳의 접견실은 흰색과 금색의 나무벽판과 밝은 색조의 비단벽지, 그리고 화려한 뉴로코코 양식의 가구들로 꾸며졌습니다. 거울 앞의 시계는 앞뒤가 모두 숫자판으로 되어 있어서 시간을 거울 속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18 세기의 파스텔 초상화들은 특히 볼만합니다 – 이는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이들이며, 마리아 테레지아가 대단히 높이 평가한 제네바의 리오타르트같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작품입니다. 난로 왼쪽의 그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 마리 앙뜨와네뜨가 사냥복 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앙뜨와네뜨는 1770년에 15 세의 나이로 나중에 루이 16세가 되는 프랑스 왕에게 시집가게 되는데 이는 부르봉과 합스부르크가의 오랜 대립의식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앙뜨와네뜨는 프랑스 대혁명의 일환으로 1793 년,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방은 가족 식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족 디너는 엄격한 궁정의식에 맞게 이루어졌습니다 – 식탁은 언제나 화려하게 꾸며졌고 중앙에는 꽃과 과일, 캔디들을 가득 채운 황금색 테이블 장식대가 세워졌습니다. 공식 디너 때는 프랑스 요리가 서빙되었고, 가족끼리 식사할 때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경우 비너 쉬니첼, 린츠굴라쉬, 타펠쉬피츠나 저 유명한 카이저쉬마른 같은 비인 요리를 선호했습니다. 항상 신선하고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은 궁정요리관으로부터 보온박스 속에 넣어져 각 거처로 운반되었으며, 바로 인접한 방에서 처음에는 석탄열판으로, 나중에는 가스열판으로 따뜻하게 데워 차려졌습니다. 황제는 식탁 중앙에 자리 잡았고, 황비도 참석할 경우에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엘리자벳은 자신의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자주 식사를 걸렀으므로 황제와 같이 식사하는 일이 아주 드물었습니다. 가족 디너는 대개 저녁 6 시에 시작하였고 3단에서 6 단까지의 메뉴로 구성되었습니다. 원형그대로 차려진 식탁의 식기 세트는 비인 호프부르크에 있는 구 „황실식탁, 은전시관“의 대여품들인데, 그 곳에는 황실에서 사용하던 도자기와 은귀중품들이 지금도 가득 진열되어 있습니다. 엘리자벳이 직접 사용하던 식탁세트 뿐만 아니라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용하던 금 식사도구 등 많은 볼거리가 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아이들 방은 마리아 테레지아 딸들의 초상화로 꾸며져 있습니다. 11 명의 딸들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하였습니다. 왼쪽 바로 문 옆에 마리 크리스티네의 초상화를 보실 수 있는데 그녀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사랑하던 딸입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허락받았는데 그 남편이 바로 알베어티나의 창립자인 알버트 폰 작센-테쉔 공입니다. 여기서 잠시 욕실을 들여다보십시오. 이 욕실은 1917년에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비인 치타를 위해 설치된 것입니다. 다음 방으로 가는 출구에서 잠시 아침식사용 별실을 들여다보십시오. 벽을 장식하고 있는 메달들의 애플리케 수공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인 엘리자벳 크리스티네가 직접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쉔브룬 궁전의 정원쪽 거처는 이 황색 살롱부터 시작됩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네바 화가 리오타르트의 파스텔화들로서 아주 사실적으로 서민층 아이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아이들을 그린 전형적인 궁정식 초상화들인데 바로 다음 방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방에는 또한 궁정화가 마틴 판 마이텐스가 그린 헝가리 여왕으로서의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화도 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거울홀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족 연회시에, 특히 소규모 연주회 등을 열 때 사용되었습니다. 1762 년에 바로 이 홀에서 이제 겨우 6 살의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첫 연주를 하였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썼습니다. „연주를 마치자 볼펄은 폐하의 무릎에 뛰어올라 목을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퍼부었어.“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방과 연이은 두 방들은 풍경화가인 요셉 로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습니다. 문 왼쪽의 첫번째 그림은 스위스 아르가우에 있는 하비히츠부르크로서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발지입니다. 궁정화가 마틴 판 마이텐스가 그린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화도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단히 활력이 넘치는 여걸이었습니다 -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럽 절반과 치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합스부르크의 세습을 지켜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합스부르크의 세습국들을 통치하였고, 그녀의 남편 프란츠 쉬테판 폰 로트링엔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프란츠 1 세로 불리는 프란츠 쉬테판은 자신의 관심사인 자연과학과 재무에 몰두하였고 국사는 자기 부인에게 일임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궁전의 중앙에 위치한 대 갤러리는 황제의 가족들이 무도회나 리셉션, 혹은 성찬장으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길이가 40 미터 이상이고 폭이 거의 10 미터에 달하는 이 대 갤러리는 궁정행사를 치르는 데 아주 적격이었습니다. 크리스탈 거울들과 금박의 석고 세공장식, 그리고 천정 프레스코들로 이루어진 이 홀은 로코코 시대의 총체예술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천정 프레스코들은 이탈리아 화가인 그레고리오 굴리옐미의 작품이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프레스코 중앙에는 프란츠 쉬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가 옥좌에 앉아 있고 그 주변에는 의인화된 통치자의 미덕, 그리고 황정 세습국의 알레고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1901 년에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나무를 깎아 금박을 입힌 두 개의 대형 샹들리에에 각각 70 개의 양초들을 꽂아 사용하였습니다. 황정이 끝난 후 대 갤러리는 연주회장으로 사용되었고, 1961 년에는 케네디와 흐루시쵸프의 역사적인 만남이 여기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옆의 소 갤러리는 궁전의 정원 쪽에 면해 있습니다. 이 홀은 가족의 명명 축일이나 생일파티 때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궁전공원과 마리아 테레지아 때 건너편 언덕 위에 세웠던 글로리에뜨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소 갤러리는 지난 번 복원작업을 통해 19 세기 때의 반짝이고 윤기나는 원래의 백색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소 갤러리의 양쪽에 중국식 별실들이 있습니다: 왼쪽이 타원형이고 오른쪽이 원형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대유행이었던 중국과 일본예술을 지극히 애호하였습니다. 두 별실 안에는 값비싼 중국산 래커 무늬판들이 흰색의 나무벽판 안에 자리잡고 있고 그 황금테두리로부터 작은 벽선반인 콘솔들이 자라나 있으며 그 위에 청백도자기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상감세공작업의 널마루바닥 역시 예술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두 별실들은 오락실과 회의실로 쓰였습니다. 중국식 원형 별실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카우니츠 재상이 비밀 회담이나 의논 등을 하였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카루쎌, 즉 승마 퍼레이드방은 두 개의 큰 그림 중 왼쪽 그림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이 그림에서 승마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귀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라하를 탈환한 기념으로 1743 년 호프부르크의 겨울 승마학교에서 개최한 행사였습니다. 오늘날 스페인 승마학교라 불리는 이 겨울 승마학교에서는 지금도 흰 말들, 즉 리피차너들의 묘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림 중앙에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도 리피차너를 타고 궁정의 귀부인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왼쪽 초상화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칼 6 세가 화려한 스페인식 코트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궁정 연회홀에서는 세례나 결혼식 등을 계기로 한 소규모의 연회들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홀을 장식하고 있는 일련의 그림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요셉과 부르봉가의 공주인 이사벨라 폰 팔마의 결혼 축하연을 보여줍니다. 이 연작회화에 저 유명한 여군주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데 바로 „유럽 제 1 의 귀부인“ 인 테레지아가 브라반트의 레이스 직물로 만든 값비싼 의상을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가장 큰 그림은 98 대의 마차를 거느린 이사벨라의 신부행렬로서, 전 유럽에서 참석한 최고 귀족들의 마차에는 그들 가문의 문장들이 뚜렷이 그려져 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청색 중국 살롱은 18 세기에 손으로 그린 한지벽지 그림들을 19 세기초에 붙여 장식한 것입니다. 이 방은 역사적으로 아주 의미있는 곳입니다: 바로 이 방에서 협상들이 열렸고 그 결과로 마지막 황제 칼 1세가1918 년 11 월 11 일에 국무포기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 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이로써 600 년간 지속되던 합스부르크가의 통치에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칼 황제는 하야하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는 1922 년에 35 세의 나이로 마데이라 섬에서 죽었습니다; 반면에 그의 부인 치타는 1989년까지 살았고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비로서 황릉인 카이저그루프트에 묻혔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뷔에-락-방은 사랑하던 남편 프란츠 쉬테판이 1765 년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회상의 방으로 바꾼 곳입니다. 북경산 검은 래커 판들을 호두나무벽판 안에 집어 넣고 황금 테두리로 장식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쉬테판이 죽은 후 한번도 검은 미망인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녀의 기도서에서 쪽지를 하나 발견했는데, 테레지아는 그 쪽지에 자신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회상의 방에 걸어 두기 위해 3 개의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중앙의 그림은 폼페오 바토니가 그린 프란츠 쉬테판입니다. 같은 화가가 1769 년에 로마에서 그린 작품으로, 요셉 2 세와 그의 동생 레오폴트의 2인 초상화도 있습니다. 오른쪽 요셉 앞의 책상 위에는 계몽사상의 정수작품 중 하나인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책이 놓여 있습니다. 계몽주의의 기본이념을 토대로 이 젊은 황제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나폴레옹 방은 프랑스 황제를 상기하게 합니다. 그는1805 년과 1809 년, 두 번에 걸쳐 비인을 점령하였을 때 예전의 마리아 테레지아 침실이었던 이 방에서 거주하였습니다. 1810 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인 프란츠 2 세 혹은 1 세 황제는 딸 마리 루이제와 나폴레옹을 혼인시킴으로써 두 권력자 사이에 마침내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마리 루이제는 아들과 함께 우선 비인의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1814년과 1815 년 비인 회의의 일환으로 그녀에게는 마침내 팔마 공국이 할당되었습니다 – 물론 그녀의 아들인 라이히쉬타트 공을 비인에 남겨 둔다는 조건으로였습니다. 궁전에서 어린 „프란치 왕자“로 칭해졌던 그는 나폴레옹의 아들이었으므로 유럽국의 요망에 의해 정치적으로 배제되어 살아야 했고, 비인 궁전에서 할아버지의 보호 하에 외부와 단절된 채 자라야 했습니다. 다른 모든 합스부르크의 남자들처럼 그도 – 가문의 전통에 따라 – 서민들의 수공업을 익혔습니다. 바로 앞의 그림은 어린 그가 정원사로 일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콘솔 테이블 위의 종달새는 그가 사랑하던 애완동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아들은 1832년 겨우 21세의 나이로 폐병으로 죽고 맙니다. 흉상은 그의 임종 모습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도자기방(방 31)에서 우리는 다시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로 돌아갑니다. 테레지아는 이 작은 방을 오락실이자 작업실로 사용했습니다. 청백으로 그려진 목각 테두리 작품은 마치 도자기같은 느낌을 풍기면서 전체 공간을 천정까지 덮고 있습니다. 그 안에 총 213 개의 푸른 묵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프란츠 쉬테판과 몇 아이들이 제작하여 서명까지 하였습니다. 한 메달 초상화는 그 아이들 중 하나인 마리 크리스티네입니다. 테레지아로부터 가장 사랑하는 딸이라고 지칭 받았던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인 알버트 폰 작센-테쉔공과의 연애 결혼을 유일하게 허락받기도 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제 이 궁전에서 가장 값비싼 방 중 하나인 백만 굴덴의 방에 들어 오셨습니다. 이 방 이름은 지극히 희귀한 장미목 종류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 인도 페르시아의 세밀화가 그려 넣어진 벽판때문에 붙여졌습니다. 이 세밀화는 16 세기와 17 세기의 인도 모굴제국 군주들의 궁정과 생활상을 그린 것이고 황실 가족들이 잘라 내어 콜라쥬 형태로 새 그림들에 합성시킨 것입니다. 방의 양 벽에는 크리스탈 거울들이 붙어 있는데 이 거울들이 서로 반사하면서 마치 끝없이 방들이 있는 듯한 환영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방은 벽 뿐 아니라 안락의자들까지도 모두 18 세기 브뤼셀의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벽 태피스트리는 시장과 항구 장면이며, 안락의자 태피스트리는1 년 12 달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소피 대공비의 서재(방 34)는 프란츠 요셉의 양친인 프란츠 칼 대공과 소피 대공비가 19 세기에 거주했던 거처의 일부입니다. 야심만만한 어머니 소피는 정력적이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합스부르크 제위에 올리는 목표를 달성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최대의 정치적 조언자이기도 했습니다 – 동시대인들은 이 대공비를 „비인궁정에서 유일한 남자“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조카이자 며느리인 엘리자벳과 그녀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엘리자벳이 비인궁정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소피였습니다. 엘리자벳은 시어머니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간섭에 대해 자주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방에서 보시는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18 세기말 무렵부터의 황제들입니다: 첫번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둘째 아들로서 요셉 2 세를 이어 황제가 된 레오폴트 2 세입니다; 그 옆은 그의 아들 프란츠로서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1806 년, 프란츠 황제는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할 수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 황국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프란츠 2 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로는 첫번째인 프란츠 1 세가 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프란츠 황제는 자신의 첫 딸 마리 루이제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냈고 둘째 딸 레오폴디네는 브라질 황제와 결혼시켰습니다. 바로 앞의 이젤 위에 있는 것이 레오폴디네의 초상화입니다. 다른 초상화들은 페어디난트 황제와 그의 부인 마리아 안나입니다. 페어디난트는 프란츠 황제의 장남이었고 국민들은 그를 친근하게 „선량한 페어디난트“라 불렀습니다 – 그는 간질병환자였고 국사를 수행하기에 무능했습니다. 실제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 황정을 지배했던 사람은 메테르니히 재상으로서 „유럽이란 마차를 끄는 마부“라 불렸습니다. 아주 능란하고 외교적인 수완으로 유럽정치를 이끌어 갔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부자방“은 비인 궁전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남아 있는 호화침대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침대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을 계기로 만들어졌고 원래 비인 호프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사저에 있었습니다. 붉은 벨벳에 값진 금은자수로 수놓아진 이 호화침대에 이전의 일부 벽커버 내장도 세트로 포함되었는데, 그것 역시 건축모양에 따라 자수를 놓은 것이었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이 방과 여기 붙은 살롱에는 19 세기에 프란츠 요셉의 아버지인 프란츠 칼 대공이 거주했습니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로 돌아가봅니다. 마틴 판 마이텐스가 그린 저 유명한 가족초상화는 프란츠 쉬테판 황제와 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입니다. 황제 부부는 16 명의 아이들을 낳았습니다(딸 11 명과 아들 5 명이었습니다). 그 중 11 명이 살아남아 성장했습니다.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직 두 명은 태어 나지 않았고 세 명은 이미 죽었습니다. 세습 황권을 확립하고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가급적 많은 자식들을 낳는 것이 통치자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가족초상화 건너편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던 여인들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거울의 오른쪽 초상화는 테레지아의 어머니 엘리자벳 크리스티네이고, 왼쪽은 푹스 백작부인으로서 테레지아의 어린 시절 유모이자 후에는 여군주가 마음을 털어 놓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녀에 대한 열렬한 유대관계의 표시로 테레지아는 자신의 유모를 합스부르크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선조들이 묻힌 카푸치너그루프트, 즉 황릉에 안장하였습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
합스부르크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사냥을 즐겼습니다 – 마리아 테레지아의 양친인 칼 6 세와 부인 엘리자벳 크리스티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이 바로 방 왼쪽에 사냥복장을 한 초상화의 주인공들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작은 소년이 후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될 프란츠 쉬테판입니다. 프란츠 요셉도 사냥광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아이 때부터 벌써 그는 쉔브룬 궁전에서 참새나 비둘기들을 사냥하곤 했습니다. 오른쪽 문 옆 그림의 배경에 피셔 폰 에어라흐가 사냥궁으로 지었던 쉔브룬 궁전이 보입니다. www.schoenbrunn.at | Download Tour-Guide (PDF)© by Schloß Schönbrunn Kultur- und Betriebsges.m.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