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smartmedian.com / 광고문의 02-515-1322
그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이단전(李亶佃), 즉 진실로(亶), 밭을 가는 놈(佃)이라는 뜻인데 설마 부모가 지어줬을 리는 없고 아마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이렇게 부른 모양이다. 그리고 필재(疋漢)라는 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의미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아래 하(下)자와 사람 인(人)자를 파자해서 필(疋)자로 정했습니다.” 뒤에 붙은 한은 보통 천한 남자를 지칭하는 상놈이라는 뜻의 상한(常漢)에 따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보다 더 자주 불렸을 호는 하인 놈, 혹은 아랫것이라는 뜻이다. 괴상한 이름에 아랫사람을 지칭하는 호를 가지고 있는 이 인물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스스로 가장 낮은 인물이라고 선언하고 다녔다. 심지어는 패랭이라고 불리는 평량자를 늘 쓰고 다녀서 이단전 대신 이평량이라고도 불렸다. 연안 이씨 집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양반집 종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도 되어있다. 전자가 맞 다고 해도 아마 몰락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조금만 돈을 모으면 양반신분을 사거나 양반 행세를 하던 시대에 일종의 역주행을 한 셈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삐딱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다름 아닌 ‘시’였다. 그가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를 짓는 솜씨하나만큼은 글공부를 한 양반 뺨을 칠 정도였다. 洞葉蕭蕭下 마을의 나뭇잎 쓸쓸히 떨어지고 溪雲寂寂生 시냇가의 구름이 조용히 일어나네. 짤막한 그의 시를 보면 과장되고 부풀어 올린 것이 아닌 서정적이면서 차분한 감정이 그려진다. 그는 자신이 지은 시를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는데 대신 갑자기 방문해서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곤 했다. 추재기이를 쓴 조수삼도 그의 방문을 받았는데 금강산에 대해서 쓴 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18세기 후반에 살았던 선비 심노숭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놨다. 그는 이단전을 천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규장각의 사검서와 절친하게 지냈다고 설명한다. 사검서는 서얼출신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백탑파의 핵심인물이다. 이들과 친했다면 아마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과도 교류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까지 역임했던 남공철이 그를 통해 최북과 만났는데 이것을 보면 최북은 물론 남공철 같은 양반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재기발랄한 그의 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왜 하인이라는 뜻의 이름과 호를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대한 나름대로의 항거로 보이는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더 없이 궁금하다. 이단전은 항상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은 시상이 떠오르면 얼른 적어서 넣었다고 한다. 시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병에 걸려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노숭에 따르면 그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다른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과음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며 안타까운 최후에 대해서 짤막하게 남겨 놨다. 중인들이 주축이 된 여항문인들이 시회를 조직하고 활발하게 시를 짓고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통청운동을 펼친 것은 자신들도 양반과 버금가는 대우를 해달라는 의미였다. 특정 계층이 부유해지면 신분 상승을 꿈꾸며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이단전은 그런 흐름과는 정 반대로 스스로 미천하다고 낮췄다. 이것은 양반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대한 개인적인 도전으로 보인다.
새로운 미디어 언론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한 2015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 스마트 미디어 N에 보내주신 관심과 배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6년에도 공감, 소통, 공유, 창조를 위해 쉼없이 발전하는 스마트 미디어 N이 되겠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더 많이 웃으시고, 더 큰 성공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임창정 주연의 영화 색즉시공에서는 차력 공연이 나온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철근 구부리기나 못을 휘는 걸 보면 누구나 눈길을 떼지 못할 것이다. 추재기이에서 파석인(破石人)에 관한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조선시대에도 차력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짧은 기사였지만 몹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름 모를 차력사에 대해서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떤 외모를 가졌을지 부터가 궁금했다. 대머리에 강인하고 험상궂은 인상일까? 아니면 작지만 차돌처럼 단단하게 생겼을까? 추재기이에 나온 차력사의 공연은 차돌깨기였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차력사가 짊어지고 온 검은 빛깔의 차돌을 하나씩 꺼내놓으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사람들이 충분히 모였다 싶으면 차력사는 공연을 시작했다. 왼손의 둘째와 넷째 손가락 위에 차돌을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위를 감쌌다. 그리고 오른손 주먹으로 내리치면 차돌 한 가운데가 쩍 갈라져버렸다. 수십, 수백 번을 하도 실패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탄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간혹 의심을 한 구경꾼들이 차력사의 차돌을 가져다가 끌이나 도끼로 내리쳐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렇게 한바탕 실력을 보여주고 난 후에 부서진 차돌들을 챙겼는데 어떤 것들을 가져가고 어떤 것들은 남겨 놨다. 그러면 사람들은 차력사가 돌을 끓여먹기 위해 가져간 것이라고 수근 거렸다. 도교의 신선 술 가운데 돌을 끓이는 법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 한 것 같다. 이 사람이 30년 전까지 길거리나 시장 통에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한바탕 차력 쇼를 하고 정체불명의 약을 팔던 이들의 조상임이 분명하다. 18세기의 조선, 특히 한양에서는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길거리 스타들이 존재했다. 재담꾼과 구기꾼, 전기수를 비롯해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까지 제각각 실력을 뽐내면서 삶에 지친 백성들에게 자그마한 즐거움을 안겨줬다. 차력사의 공연은 앞서 얘기한 이들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안겨줬을 것이다. 기록으로만 보면 차력사가 길거리에서 차돌만 부수고 간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 여러 명이 팀을 이룬 채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생계유지를 위해서 약이나 다른 물건들을 팔았을 것이다. 오늘날은 차력사들의 공연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들이 파는 약이 가짜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들의 신기한 능력에 감탄한 나머지 신선 술을 쓰는 신기한 능력자로 봤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조선 후기의 문집들을 많이 읽어봤지만 차력사를 다루는 것은 현재로서는 추재기이가 유일하다. 그것은 다른 공연보다 더 거칠고 험악했기 때문에 점잖은 양반들로서는 다루기 어려웠을 수 도 있고, 차력사 자체가 다른 공연을 하는 이들보다 희귀했을 수 도 있다. 어쨌든 조선의 다양한 길거리 공연들 중에서 차력사가 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구경꾼들로 하여금 신선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과천에 살던 평범한 백성이 물의 신선이 된 과정과 이유는 다소 서글프다. 어릴 때 부모와 일가친척을 모두 잃은 그는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신분제도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노비들의 이탈이 두드러졌는데 이런 현상은 1801년 공노비를 혁파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결국 노비들을 대체할 고공(雇工)이라는 일종의 임금 노동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머슴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노비가 아니라 고공이었다. 과천의 백성도 머슴이나 고공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순조 14년인 1814년, 대기근이 들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이어지던 시기 유독 큰 가뭄과 흉년이 자주 들었는데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이는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이때도 흉년에 쌀값이 크게 뛰고 일거리가 없어지자 가난했던 그는 당장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보통은 이판사판으로 칼을 들고 도적이 됐지만 그는 심성이 착했는지 그냥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사는 걸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용히 죽기로 결심한 그는 관악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간 곳에는 맛이 좋기로 유명한 샘물이 두 개 있었다. 계곡으로 들어간 그는 두 개의 샘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산 아래로 내려와서 바람과 햇빛을 쬐었다. 그리고 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는데 그를 불쌍하게 여긴 사람들이 밥을 주면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에 밥을 구걸하는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샘물로 달려가는 일을 반복했다. 번갈아가면서 물을 마셨는데 신기하게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을 물만 먹고도 멀쩡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그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그가 물로 배를 채우면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크게 풍년이 들면서 곡식 값이 떨어지고 일거리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여유가 생기면서 그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전에는 먹는 일로 크게 고생을 했다가 각곡방(却穀方)을 배워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다시 품을 팔아서 고생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그가 말한 각곡방은 벽곡법이라고도 불리는 도교의 수련법으로 곡식 대신 솔잎 같은 것을 먹는 수련법을 말한다. 그가 산 속에서 도인을 만나서 깨우침을 얻은 것인지 아니면 죽을 각오를 하고 물을 마시다가 그리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물로 배를 채우고 굶주림을 느끼지 않았는데 언뜻 보면 얼토당토않지만 최근에도 술이나 특정 음식만 먹는 기인들이 있는걸 보면 무작정 거짓말로 치부하기는 애매하다. 어쨌든 이렇게 물로 배를 채우는 동안 본의 아니게 능력이 하나 더 생겼는데 바로 물맛을 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물을 마시면 이게 우물에서 퍼온 것인지 샘에서 떠온 건 지, 아니면 강물을 가져온 것인지 귀신 같이 맞춘 것이다. 고기나 김치도 아니고 물에 맛이 있다는 얘기가 상당히 낯설게 들리겠지만 물들도 토질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을 본 사람들은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바로 물의 신선이라는 뜻의 수선(水仙)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능력자에 대한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가 마침내 한양의 어느 판서 귀에까지 들어갔다. 판서는 그를 불러다가 한양의 물맛을 감별하게 했다. 수선은 물을 전부다 맛 보고는 삼청동의 성천을 으뜸으로 치고 훈련원의 통정과 안현의 옥폭을 나란히 다음으로 꼽았는데 2등이 아니라 3등으로 정했다. 2등이 되기에는 조금 모자랐던 것일까? 이렇게 명성을 크게 떨친 수선은 명산을 유람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18세기 접어들면서 학문은 더 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중인들이 글을 읽고 노비들이 시를 짓는 일이 일상사가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여항문인(閭巷文人)이라고 일컬었는데 여항은 일반 여염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자 사연을 가진 수많은 여항문인들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아마도 양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모습에 하층민들은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성공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는 원래부터 글공부를 해야 하고 그럴만한 여유가 있었던 양반들과는 달리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거나 혹은 글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들이었다. 정봉 역시 그러했다. 그는 나무꾼이었기 때문에 초부라고 불렸고, 당대 사람들 역시 정 초부라고 불렀을 것이다. 정봉의 원래 신분은 양근, 오늘날의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어느 양반집의 노비였다고 전해진다. 노비의 신분이 세습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부모 모두나 어머니가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지만 총명한 머리 덕분에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아마 오다 가다 주인마님이나 도령이 책을 읽는 것을 귀담아 듣다가 바로 외워버린 모양이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이런 일이 계속되자 주인은 그의 영특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자기 자식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글 솜씨가 나날이 늘어났다. 특히 시를 잘 지으면서 명성을 떨쳤는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양근 땅에 사는 나무꾼 시인이라고 알려졌다. 마치 무림 고수들 사이에서 은거하고 있는 진짜 고수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식이었다. 조수삼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다투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외모와 이름, 그리고 출신들이 제각각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주인집에 매어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주인이 글 솜씨가 아까워서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줬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사는 외거노비로 풀어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배 한척을 구해서 양근과 동호(東胡), 그러니까 오늘날 동호대교가 있는 옥수동의 나루터를 오가면서 땔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연명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한양을 오가게 되면서 정 초부는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그가 이 시는 아마 땔감을 팔러 오가던 동강의 풍경을 읊은 것이리라 東湖春水璧於籃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다. 白鳥分明見兩三 눈에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楡櫓一聲飛去盡 노를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 버리고 夕陽山色滿空潭 노을 아래 산 빛깔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이 시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도강도의 그림 위에 쓰는 시문인 화제(畫題)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도화서 화원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김홍도가 자신의 그림에 시를 남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명성을 떨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지은 시들은 서정적이면서도 자연의 풍광을 거침없이 노래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시들은 한양의 내놓으라 하는 양반들은 물론이고 거리의 여항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시가 계층을 떠나 큰 사랑을 받았다는 점은 노론 양반들로 구성된 시회인 동원아집에 초청을 받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휴대폰 판매원에서 일약 슈퍼스타가 된 폴 포츠처럼 당대의 명사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민중들은 나무를 하는 노비라는 신분에도 굴하지 않고 시로서 명성을 떨친 그의 성공담을 두고 두고 얘기했다.
우리는 종종 TV나 뉴스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거나 모두 외면하는 일에 나서는 영웅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저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세상이 살만하다고 흐뭇하게 생각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던 조선시대에도 이런 영웅들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았다. 장오복 역시 앞서 소개한 김오흥 같이 길거리 협객이었다. 김오흥이 배를 모는 강대사람이었다면 그는 한양의 관청에서 일하는 경아전이었다. 나름 공무원이긴 하지만 항상 양반인 상관에게 무시와 구박을 당하는 계층인데 그것 때문에 협객을 자처했는지도 모르겠다. 경아전에 나름 힘깨나 썼다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힘센 권력가의 비서실장격인 청지기 노릇을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길을 가다가 싸움판이 벌어지면 걸음을 멈추고 옆에서 구경했다. 그러다가 강한 쪽이 힘을 믿고 약한 쪽을 윽박지르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우기면 중간에 끼어들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유리한쪽이 눈을 부라리기 마련이지만 장오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목조목 이치를 따져가면서 결국 사과를 받아내도록 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싸움이 나서 길어지면 주변 사람들이 장오복이 온다고 소리쳐서 뜯어말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힘이 없어서 이리저리 시달리던 백성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자 큰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싶다. 그는 한양에 살면서 이런 저런 일화들을 남겨 놨다. 하루는 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광통교를 지나가는데 때마침 건너편에서 건너오는 보교(步轎)와 마주쳤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보는 가마인데 여주인공이나 그녀의 어머니가 타고 다니는 뚜껑이 달리고 사방이 막혀있는 형태다. 가마에는 가마꾼 뿐 만 아니라 시종하는 인원들이 제법 많았다. 좁은 다리 위라서 장오복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깨를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자 가마꾼이 그를 밀쳐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장오복은 발끈 성을 내고는 차고 다니던 칼을 뽑아들고는 소리쳤다. “천한 가마꾼 놈들이 이리 기세를 떠는걸 보면 분명 가마 안에 탄 계집 때문이렸다.” 그리고는 칼을 휘둘러서 가마의 밑바닥을 찔렀다. 보교의 밑바닥은 보통 소가죽을 깔아놨기 때문에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고 아마도 위협을 가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교 안에 있던 요강에 맞아서 큰 소리가 나고 말았다. 보통 여인들이 타는 보교 안에는 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종이를 깐 작은 요강을 넣었는데 여기에 맞은 모양이다. 요강에 맞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가마의 주인공이 문제였다. 그녀는 검계를 토벌한 장붕익의 손자인 장지항의 애첩이었다. 할아버지인 장붕익처럼 무관이었던 그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비롯해서 어영대장등을 지낸 고관이었다. 협객이라고 자처하고 백성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는 하지만 일개 아전에 불과한 그가 건드릴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나 따를까 보고를 받은 장지항은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앞으로 끌려온 장오복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대신 배포 좋게 대꾸했다. “당신이 위에 있어서 나라가 평안하고 제가 거리에 있어서 다툼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사내대장부는 오직 장군과 저 밖에는 없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천한 계집 때문에 저를 죽이려 하시니 어찌 장군을 사내대장부로 생각하겠습니까?” 그 얘기를 들은 장지항은 껄껄 웃으면서 그를 풀어줬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굽혀서 남을 도와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자주 신발을 선물하던 장인이 연모하던 기생이 있음을 알고는 도우미를 자청했다. 그래서 기생이 있는 기방에 앉아 있다가 장인이 나타나자 허둥지둥 뒷문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러자 장인이 연모하던 기생은 장오복이 두려워서 몸을 피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고는 대접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협객에 로맨티스트였으니 길거리에서 인기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다. 양반들은 협객들을 무뢰배나 다름없다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오늘날에도 남을 돕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시민의식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어쩌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협객의 존재는 그 사회의 건강함을 재는 바로미터가 아닐까?
조선시대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여러 가지 직업 중 가장 흥미로운 직업은 아마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傳奇叟)일 것이다. 문맹률이 거의 제로인 오늘날에는 타인의 입에 의지해서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한문이 주로 쓰였던 조선시대에는 아마 백 명 중에 한두 명 정도만 글씨를 읽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접어들면서 한글로 된 소설책들이 등장하면서 아녀자들과 일반 백성도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다.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과 갈증은 나날이 높아져 갔지만, 여전히 책은 고가의 물건이었고, 귀한 존재였다. 그 틈을 메워준 것은 다름 아닌 책의 내용을 들려주는 전기수였다. 시간과 돈이라는 장벽을 입을 통해서 뛰어넘게 해준 것이다. 그렇다고 전기수가 단순히 글을 못 읽는 사람에게 책을 낭독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내용을 강의하더라도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해주는 강사가 있는 것처럼 이들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포장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비슷한 장르로 창이 있긴 했지만, 일반 백성이나 부녀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종이에 활자로 인쇄된 책과 전기수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후자는 전기수의 몸짓이나 표정, 혹은 몸짓 덕분에 이야기가 지루해지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전기수의 낭랑한 목소리는 눕거나 혹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실력이 좋은 전기수들은 슈퍼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업복은 전기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생활사를 보여주는 책에서도 이미 소개가 되었고, 별순검이라는 인기 드라마의 일화에도 등장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얼인 그의 본래 직업은 겸인(傔人), 즉 청지기였다. 서얼 중에서도 풍족한 삶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지 아니면 집이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지기는 노비는 아니었지만 결국 주인의 수발을 드는 미천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낭랑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풍부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전기수로 나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반집 부녀자들을 비롯한 한양의 부호들이 다투어 그를 초청해서 얘기를 들었다는 것을 보면 전기수로 나선 직후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토해내면 듣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거나 미친 듯이 웃었다고 하니, 아마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지 않았나 싶다. 사실 전기수의 등장은 소설의 탄압과도 연관이 있다. 정조는 소설을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탄압했고, 문체를 규정지으려고 했다. 정조는 전기수의 얘기를 듣던 구경꾼이 주인공이 좌절하는 부분을 듣자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담배 써는 칼로 무참히 살해하는 사건을 직접 언급하면서 소설의 위험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이업복이 활약하던 시대 역시 이렇게 소설이 불온한 취급을 받던 때였다. 이업복을 소개한 청구야담에는 그가 옆집에 사는 아전의 딸을 겁탈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기수와 양반집 부녀자 간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전기수를 찾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었다. 한 말로 접어들면서도 전기수들은 여전히 맹활약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극장의 변사로 탈바꿈했다가 우리 곁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딱히 오락거리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돈이 좀 있으면 기방에 가서 기생들과 어울리거나 술을 마시면서 놀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유흥은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백성들에게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공연들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도 있었고, 소설의 내용을 들려주는 전기수들도 있었지만 가장 사랑을 받은 건 역시 익살과 풍자를 곁들인 재담꾼들이었다.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거리낌 없이 내리는 관리들을 비꼬는 황새결송을 메인 레퍼토리로 하는 김 옹이 큰 인기를 끌었다면 정조 때 활약한 재담꾼인 김중진은 오이무름이라는 뜻의 과농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오이무름은 오이를 푹 삶은 다음 초간장으로 간을 하고 생강과 후추를 넣어서 만든 요리로 치아가 없는 노인들이 먹기 좋은 음식이다. 김중진이 과농이라고 불린 이유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치아가 모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웃음보가 터질만한 외모였기 때문에 단번에 백성들의 눈길을 잡아끌었지만 재담꾼으로도 진가를 발휘했다. 풍자와 해학에 달인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세 선비의 소원이라는 다소 교훈적인 이야기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어느 날, 저승사자의 잘못으로 예정보다 일찍 하늘나라로 간 세 선비가 옥황상제 앞에 서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그들을 다시 현생으로 돌려보내주기에 앞서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첫 번째 선비가 나서서 말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면 이름난 가문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좋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서 높은 관직에 올라 임금님을 모시고 역사에 이름이 남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옥황상제는 그 선비가 살아생전에 음덕이 있었으니 마땅히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이어서 두 번째 선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한다. “살아생전에 가난이 너무 지긋지긋했습니다. 새로 태어나면 부자 집에 태어나서 많은 돈을 가지고 부모와 처자식을 배불리 먹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풀고 싶습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얘기를 들은 옥황상제는 두 번째 선비가 생전에 가난하게 지낸 것은 전생에 부자로 살면서 타인은 업신여기고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것에 대한 벌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조상이 공덕을 쌓았으니 조상을 봐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한다. 두 선비가 물러나고 옥황상제는 마지막 남은 선비를 바라봤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마지막 선비가 입을 열었다. “저는 앞의 두 사람처럼 출세나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홍수와 가뭄이 들지 않고 부역과 세금이 없는 산과 물이 있는 좋은 땅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약간의 논밭을 가지고 싶습니다. 논밭을 일궈서 나온 곡식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자식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 노비들도 말을 잘 들으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백 세까지 편안하게 살다가 병 없이 죽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마지막 선비의 소원을 들은 옥황상제는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지금 네가 말한 것은 바로 청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지만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것이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다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아쉬움을 남기겠느냐?”
최근 들어서 걸 그룹들의 과다한 노출이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성의 상품화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어른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문득 남녀칠세부동석의 나라 조선에는 어른들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추재기이에서 의영에 관한 이야기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는 재담꾼이었다. 비록 실력은 김 옹이나 김중진 같은 이들에게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음담패설’이었다. 그것도 슬쩍 비춰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선 보였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을 때 내는 신음소리와 자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한다. 거기에 곁들여서 동물들의 흉내를 냈다고 하니까 아이들도 왔다 갔다 하는 훤한 대낮의 길거리에 노골적인 19금 공연이 라이브로 펼쳐진 것이다. 사실 조선후기에는 성인문화가 꽃을 활짝 피웠다. 기방에서는 신입 기생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손님들 앞에서 옷을 다 벗기는 신고식을 했다. 노골적인 춘화도도 널리 퍼졌고, 금병매 같이 중국에서 들어온 성애소설들도 안 읽는 이가 없었다. 재담꾼 김 옹도 음담패설집인 어면순에 담긴 이야기들을 자주 얘기했다고 하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에 관한 호기심과 열정은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유학을 숭상하던 사대부들의 나라 조선 역시 아랫도리는 무장해제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의영이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았던 것일까? 아니면 실력으로는 재담꾼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자기만의 분야를 개척한 것일까? 하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천하에 즐기고 구경할만한 것으로 이것만한 것이 없다. 가볍게만 생각하지 말고 도안(道眼), 즉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터득할 수 있고, 과하지 않게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얘기는 의영이 길거리에서 음담패설을 하고 음란공연을 한 것이 경쟁력을 강화하거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비록 난잡하고 음란하다는 비난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활동을 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케이블에서 맹활약을 하는 신동엽과 비슷한 포지션으로 보인다. 다른 재담꾼에게서는 보기 힘든 노골적인 음담패설과 음란함 덕분에 그는 거리의 명물이자 스타로 대접받으면서 조수삼이 쓴 추재기이의 한 켠에 실리는 영광을 누렸다. 조수삼은 효녀와 효자, 명망 높은 학자들과 위대한 시인들 사이에 이렇게 음란함으로 먹고 사는 사람을 올렸다. 그것은 의영의 존재, 나아가서는 음담패설과 외설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크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실력뿐만 아니라 행운을 비롯한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그 중에는 끈기도 필요하다. TV속 기인열전에 등장하는 기인들 대부분은 뭔가를 굉장히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번에 소개할 조선의 길거리 스타는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거나 쌈박한 재주를 가졌던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얘기를 듣고 나면 ‘이런 지지리 궁상...’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법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스타들과는 달리 한 게 거의 없었다. 단지 봄과 가을, 화창한 날 잔치가 열리고 풍악이 울려 퍼지면 어느 샌가 나타나서 맞은편 산꼭대기 위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잔치에 껴서 실력을 뽐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꼭대기에 앉아있는 게 전부였다. 잔치 구경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망원경이 없던 시절이니 산꼭대기 위에 올라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 십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잔치판에도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항상 모습을 드러내자 이제는 그가 보이지 않으면 잔치를 연 사람들이 섭섭해 하거나 걱정을 할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조수삼은 그가 몰락한 양반 홍생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생은 생원을 뜻하는 말이지만 실제 생원시에 합격 했다기보다는 그냥 관례적인 높임말로 보인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앉아있다고 해서 홍봉상(洪峯上)이라고 불렀다. 홍씨 성을 가진 이 양반은 왜 집에서 글을 읽지 않고 남의 잔치판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앉아있었을까?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몰락한 양반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잇단 전쟁과 당파싸움의 여파 때문인데 조선의 양반은 확고부동한 신분계층이 아니었다. 물론 경화세족(京華世族)이라고 불리는 귀족화된 양반집단도 등장하지만 외척 집안인 안동김씨를 포함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별다른 기반이 없고, 2~3대에 걸쳐서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홍봉상 역시 그런 부류로 보인다. 잔치판에 기웃거리면 그나마 먹을 것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양반의 자존심상 직접 구걸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가 선택한 차선책은 잔치판이 훤히 보이는 산꼭대기에 앉는 것이었다. 그런 기구한 사연이 있었지만 어쨌든 산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그의 존재는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될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그가 나타나면 잔치판의 기생이나 악공, 손님들은 다 같이 외쳤다. “저기 봐! 홍봉상 어르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들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보냈다. 그러면 홍봉상은 굶주린 배를 채우고 조용히 사라졌다. 홍봉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조선의 아픔이나 어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존심과 배고픔 사이에서 그는 산꼭대기에 앉은 것을 선택했고, 사람들은 그의 등장에 환호를 보냈다. 존재감 그 자체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갓과 망건은 필수품이었다. 망건은 틀어 올린 상투를 고정시키기 위해 이마에 감싸는 일종의 두건이었고, 갓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른 머리에 쓴 모자의 일종이었다. 행세깨나 하는 양반들은 물론이고 중인들도 망건을 두르고 갓을 썼다. 갓과 망건 모두 말총이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는데 만들기가 몹시 까다롭고 귀했기 때문에 다들 애지중지했다. 조석중은 바로 갓이나 망건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장인이었다. 지금은 갓과 망건을 만드는 일은 별개의 일로 취급받지만 당시에는 갓을 만들던 사람이 망건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전국을 떠돌았는데 그렇게 해도 먹고 살만큼 일거리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조석중의 외모는 몹시 인상적이었는데 키가 크고 눈썹이 짙으며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 손재주가 좋아서 하루에 망건 하나를 만들고, 사흘이면 갓 하나를 완성했다고 한 걸 보면 꽤 손이 빠른 장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올챙이배를 하고 송충이 눈썹에 키가 큰 그는 대번에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조석중은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이었고, 배포도 커서 남과 잘 어울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친구와의 약속을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술 좋아하고 마음씨 좋으며 오지랖 넓은 스타일로 보인다. 그런 그를 조선의 길거리 스타로 완성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기부’였다. 조석중은 갓과 망건을 팔아서 번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 그렇다고 그가 풍족하게 산 것은 아니었다. 집이 없는 떠돌이였던 그는 갓과 망건을 만드는 도구와 옷가지들이 든 보따리를 들고 다녔다. 아무리 전국을 떠돌면서 일을 한다고 해도 돈을 벌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을 사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발품을 팔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는 작업장도 하나 얻는 게 보통 사람들의 꿈이자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대신 남을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썼다. 이렇게 기부를 한다고 해도 누가 알아주지는 않았을 텐데 참으로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가끔씩 들려오는 훈훈한 소식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자신도 어렵고 힘들면서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배고픔을 겪어봤기 때문에 타인에 고통을 그냥 못 지나치는 것일까? 조석중도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아마 누군가는 그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착실하게 돈을 모으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써야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줄이고 희생하면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백성이 남을 돕는 구휼을 하면 신분을 올려주거나 명예직이긴 하지만 관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조석중은 그런 혜택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성격도 화끈하고 술도 좋아하는데다가 남도 잘 도운 조석중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스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농담 삼아서 자신을 현세에 나타난 미륵불인 재세미륵불이라고 지칭했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그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경상도 출신이라고 짐작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성이 장 씨고, 송죽, 즉 소나무와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서 장 송죽이라고 불렸다. 송죽 그림은 물론이고 물고기와 새를 잘 그렸으며 각종 서체까지 잘 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붓을 쓰지 않았다. 오직 손가락으로만 그렸다. 워낙 섬세하게 잘 그렸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나 붓글씨를 본 사람들은 손가락을 붓 대신 썼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붓 대신 손가락이나 손톱, 혹은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라는 이 방식은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붓으로 해야 한다는 통념을 산산조각 냈다. 17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이 방식은 곧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미친 화가라는 별명으로 소개한 최북의 풍설야귀인도가 가장 유명하다. 최북만큼은 아니지만 장송죽 역시 지두화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술에 취하면 먹물을 한 사발 들이키고 종이 위에 뿜은 다음에 손가락으로 척척 그려냈다. 취한 그의 손끝에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그려지고 잔잔한 호수에서 노니는 물고기와 나무에 앉은 새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다는 달이 탄생했다. 양반들은 지두화를 천시했다. 붓으로 그리지 않은 그림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을 고수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지두화에 열광했다. 풍설야귀인도를 보면 양반들이 왜 지두화를 싫어했으며 백성들은 열광했는지 알 수 있다.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와 붓으로 그린 다른 그림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 공간을 채우는 이미지라는 측면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 그리고 무엇을 채우는지에 대해서는 갈라진다. 붓이라는 매개체를 거친 그림은 법칙과 규격에 몸을 굽힐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것 대신 상징과 관심에 젖은 그림들은 양반들의 감상품으로는 적합했지만 공자와 맹자 대신 자연을 벗 삼고 거리를 활보하는 백성들에게는 외면당했다. 붓을 거치지 않는 지두화는 필연적으로 불온할 수밖에 없다. 붓이 가는 대로가 아닌 머리가 이끄는 대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붓으로 그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지만 지두화는 손가락이 가지고 있는 광폭함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흐릿하고 위태로운 백성들의 삶과 강렬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양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지두화의 새로움이 백성들의 눈에는 보였던 셈이다. 새로운 것은 늘 불온한 것이라고 외면했던 양반들에게 지두화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존의 관습과 규칙에 억압당했고, 변혁과 개혁을 꿈꾸던 백성들에게는 지두화는 꿈이자 암시였다. 장송죽은 당대에는 꽤 유명했던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자세한 행적이나 그림이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지두화를 그릴 때는 늘 취해있었다는 점은 세상을 향해 미쳤다고 외치면서 술에 취해 살아가던 최북과 닮아있다. 그들에게 조선은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세상이었을까?
이번에 소개할 삼월이는 학문이나 시 같은 것으로 유명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50살이 되도록 혼자 살았던 노처녀였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놀림감이 될 만 한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일찍 결혼하는 조혼풍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대략 10대 중후반이 되면 배필을 찾아서 혼사를 치렀다. 평균수명이 짧은 이유도 있지만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는 것이 연금 같은 것이 없던 이 시대의 가장 확실한 노후보장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독신이나 솔로 같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늦도록 혼인을 못하면 국가가 나서서 짝을 지워주고 혼수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늦도록 결혼을 못하는 것은 큰 흉이 되었다. 장가를 가서 상투를 올리지 못하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른 대접을 못 받은 것도 이러한 인식 때문이리라. 이런 분위기속에서 서른이나 마흔도 아니고 쉰을 넘긴 노처녀가 대낮에 한양을 활보하는 것은 대단히 이채로웠을 것이다. 자세한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계집종에게나 어울릴법한 삼월이라는 이름하며 늦은 나이까지 혼자 살았다는 점을 보면 일찍 부모를 잃은 가난한 집안 출신 인 것 같다. 유명인이나 스타보다는 오히려 조롱거리에 가까울 법한 그녀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다름 아닌 독특한 버릇과 성격 때문이었다. 삼월이는 할머니 소리를 들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처녀처럼 곱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한 채 떡과 엿을 팔러 다녔다. 지금도 노인이 젊은 사람처럼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다니면 단박에 눈에 띌 것이다. 하물며 조선시대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왜 매일 처녀처럼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 했다. 떡과 엿을 팔 것이라면 굳이 번거롭고 돈이 드는 치장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물음 속에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느냐?’는 비꼼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월이는 뜻밖의 대답을 한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내 배필이라서요.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늙어 보이기 싫다는 대답 정도를 기대했던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답변이었다. 세상 모든 남자를 내 짝으로 생각한다는 당찬 생각을 한 그녀는 곧 한양의 명물이 되었고,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구 밖에 사는 삼월이는 처녀인데 남편이 많다고 하네’라는 민요도 만들어졌다. 비록 남들을 울리고 웃기는 재주나 뛰어난 학문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특유의 당당함으로 백성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요즘이라면 ‘세상에 이런 일이.’이나 ‘생생 정보통’ 같은 프로그램에서 당장 섭외했을 것 같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라고 부른다면 과한 얘기일까? 사실 삼월이는 괴짜이거나 히스테리 가득한 그저 그런 노처녀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신세한탄 하는 법 없이 떡과 엿을 팔아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졌다. 세상을 비관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씩씩하게 돌아다니면서 세상 모든 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배포도 부렸다. 조선 시대 그 어떤 여성보다 당당하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간 인물이었다. 사람들의 그녀의 삶을 경외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호기심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녀의 주 고객이었을 아줌마들은 홀로 사는 그녀의 멋진 삶을 응원하지 않았을까?
작년에 TV로 방영되어서 큰 인기를 끈 사극 ‘마의 백광현’은 말을 고치는 수의사인 마의에서 일약 임금의 주치의인 어의가 되는 백광현의 성공담을 그렸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성공한 의사로서 아니라 명의로서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조희룡이 쓴 호산외기에는 백광현이 왜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신의(神醫)라는 명칭을 뛰어넘은 태의(太醫)라고 불렸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다. 마의는 왕실에서 쓰는 말과 수레, 목장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복시에 소속되었는데 제일 낮은 품계인 종9품의 관리였다. 아무리 품계가 올라도 원칙상 종6품 이상은 불가능한 말단 관리인 셈이다. 하긴 사람을 고치는 의원들도 중인의 신분을 면치 못했던 조선시대에 말을 고치는 마의가 좋은 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었다. 백광현은 풍채가 좋았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낡은 옷을 입고 항상 남에게 뭔가를 빌려야만 했다. 그런 백광현을 업신여긴 무뢰배들이 종종 시비를 걸었지만 그는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고 웃어 넘겼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마의가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의는 잡직이긴 하지만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직업으로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드라마에서는 사복시에 소속된 마의로 나오지만 호산외기나 실록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말을 고치는 일은 워낙 수요가 많아서 사복시 말고도 민간에서 일하는 마의들이 제법 되었는데 혹시 드라마에서처럼 우연찮게 스승에게서 비법을 배웠던 것일까? 아마 거리를 오가다가 어떤 계기로 말과 접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기록에는 본래 말을 타는 무사였다고 했으니 이것과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마의로서 명성을 떨친 그는 어떤 계기로 인해서 사람들의 종기를 치료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의 종기는 사망률 1,2위를 다투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의 침이 종기에도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차츰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체계적으로 의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치료 중에 간혹 환자들을 죽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게 끝까지 노력한 덕분에 살려낸 환자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종기를 잘 치료한다는 그의 명성은 마침내 궁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현종의 종기를 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내의원 어의로 발탁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숙종 때는 포천현감으로 임명되었고, 품계는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한 때 헐벗은 채 길거리를 배회하던 그가 마의를 거쳐 어의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명의로서 이름을 떨친 의원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과 왕실을 치료하는 어의로 활동해서 백성들에게 혜택이 주어지지 않거나 혹은 명성을 누리면 돈을 탐내는 모습들을 보였다. 하지만 백광현은 어의 정도 되면 돈 많은 양반들만 치료해도 충분했을 텐데 초심을 잃지 않고 항상 공손하게 환자들을 대했다. 요즘 말로 하면 초심을 잃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병자가 청하면 신분에 상관없이 찾아가서 최선을 다해서 치료했다. 나이가 들고 귀한 몸이 되었다고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은 낮은 자세로 환자들을 대하는 그에게 열광했다.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대부들도 다투어 그의 아름다운 일화를 남겼다. 그래서 종기에 걸린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가 없으니 살아남기 어렵다고 한탄했으니 백광현은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된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고 낮은 자세로 환자들을 돌봤던 그야말로 사람들을 살리던 진정한 길거리 스타, 아니 영웅이 아니었나 싶다.
TV도 없고 영화관도 없던 조선시대에는 뭐든 라이브로 봐야 했다. 마찬가지로 무대가 없었던 예술가들 역시 길거리에서 직접 관객들을 상대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개그콘서트가 열리고 가요무대가 펼쳐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오늘날처럼 막대한 부와 성공은 못 누렸지만 오늘날에 버금가는 사랑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담꾼들은 많은 인기를 누렸다. 단순히 말을 웃기게 한다거나 잘 했다는 수준을 넘어서 관객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풍자를 곁들였기 때문이다. 김 옹은 재담꾼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했는데 조수삼이 그를 이야기 주머니라고 부른 것으로 봐서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 대신 노인이라는 별칭이 붙었으니 아마도 꽤 나이가 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해학과 풍자를 보면 세상사를 깊이 꿰뚫고 있던 학문적 지식을 갖춘 인물이라고 보인다. 그의 메인 레퍼토리는 황새결송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경상도의 어느 부자가 먼 친척에게 재산을 떼어달라는 협박을 받고는 형조에 소송을 하면서 시작된다. 부자는 당연히 공정한 판결을 기대했지만 친척에게 뇌물을 받은 형조의 관리는 부자에게 패소판결을 내려버리고 만다. 말도 안 되는 판결에 재산의 반을 잃게 된 부자는 형조의 관리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면서 입을 연다. 어느 날 산속에서 꾀꼬리와 뻐꾸기와 따오기가 서로 자신이 목소리가 예쁘다고 자랑을 하다가 시비가 붙고 말았다. 그래서 새들은 숲 속에 사는 황새에게 찾아가서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예쁜지 결정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정상적이라면 꾀꼬리와 뻐꾸기 중 하나가 뽑혀야겠지만 황새는 의외로 따오기의 목소리가 가장 예쁘다는 결정을 내린다. 사실은 목소리가 가장 쳐졌던 따오기가 황새에게 은밀하게 뇌물을 바쳤던 것이다. 경상도 부자는 하물며 황새도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고 얘기하고는 물러난다. 졸지에 황새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형조의 관리들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못 들었다. 말할 나위 없이 뇌물을 받고 그릇된 판결을 내리는 관리들을 풍자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삼설기라는 소설집에 수록되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어 본 당대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으리라. 이렇게 김 옹은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구성지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단순히 웃기는 수준을 넘어서서 시대의 잘못을 토로하고 부패한 관리를 비꼬는 통쾌함을 선사한 것이다. 사람들은 익살스럽게 얘기하는 김 옹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풍자란 시대와 맞서는 웃음이나 다름없었다. 풍자할 것이 많은 세상도 문제가 있지만 그런 풍자조차 마음 놓고 못하는 세상은 더더욱 큰 문제가 있다. 조선의 민중들은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부당한 판결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김 옹은 그런 민중들의 아픈 마음을 황새 결송을 통해서 웃음으로 달래주었다.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먹고사는 늙은 재담꾼인 김 옹이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기억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이나 악기, 혹은 새나 짐승들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을 성대모사라고 부른다. 요즘 토크쇼에서 가장 많이 하는 개인기이며 장기 자랑을 하면 하나쯤은 나오는 레퍼토리다. 조선시대에는 성대모사를 입으로 내는 재주라는 뜻의 구기(口技)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구기꾼들은 전기수나 재담꾼처럼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뱁새라는 별명을 가진 구기꾼을 소개하고 있다. 뱁새라는 별명답게 키가 3척이 되지 않고 얼굴이 어린 아이처럼 작았다고 한 것을 보면 왜소증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대모사 실력만큼은 탁월했는데 특히 악기 소리를 잘 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입으로 생황과 퉁소 같은 악기 소리를 내면서 동시에 코로 거문고와 비파소리를 내서 화음을 맞추는 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했는데 원래 악기가 내는 것 보다 더 실감났다고 한다. 뛰어난 솜씨 덕분에 기방이나 양반집 잔치에도 자주 초대를 받았는데 그럴 때는 항상 형이 붙어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형은 동생과는 반대로 키가 훤칠해서 황새라고 불렸다. 키 차이가 꽤 나는 것으로 봐서는 진짜 형제가 아니라 경호원이나 매니저 격이 아닌가 싶은데 뱁새와 황새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빵 터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키가 큰 사람을 골라서 형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조수삼 역시 자신의 책에 두 사람의 인상 깊은 모습을 시로 남겨 놨다. 노래도 아니고 휘파람도 아닌 것이 구름을 뚫고 하늘까지 솟구치네. 코에서는 거문고와 비파 소리 들리고 입에서는 생황과 퉁소 소리 들리네. 협객들의 소굴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는 우스운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형님은 황새요 아우는 뱁새라네“ 협객들의 소굴은 아마 한량들과 왈짜들이 어울리는 노름판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축해본다. 어쨌든 키 작은 뱁새 동생과 키 큰 황새 형은 등장 그 자체만으로도 이슈가 되었다. 아마 길거리를 지나가면 지금처럼 사인공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다들 알아보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 밖에도 각 지역마다 나름대로 구기를 잘한다는 사람이 한둘씩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만큼 잘 알려지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부담 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이런 예능은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가끔 TV에서 개그맨이나 일반인들의 깜짝 놀랄만한 성대모사를 보면 나도 모르게 조선시대 입으로 백성들을 사랑을 받은 키 작은 구기꾼과 그의 꺽다리 형을 떠올린다.
그는 왕씨였다. 고려 때 태어났다면 왕실의 일원으로 떵떵거리며 살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태어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배고픔이 일상이 된 생활을 이어갔다. 어릴 적에 부모님을 모두 잃었는지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스물 네 살에 노파가 하는 주막집에 일꾼이 되었다. 주막집에서 일하는 일꾼을 중노미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처럼 월급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아마 끼니를 거르지 않게 먹여주고 잠자리를 주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노미 노릇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걸 본 노파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꾸짖으면서 책을 빼앗곤 했다. 사실 주막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중노미에게 글이나 책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주막집 노파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천성이 글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이걸로 성공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시 같은 게 없던 시절이니 아마도 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는데 밤이 깊어지면 아궁이 앞에서 글자를 읽었다. 노파는 아무리 꾸짖어도 그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자 결국 후원자로 돌아섰다. 여느 때처럼 일을 끝내고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읽고 있던 그에게 다가온 주막집 노파는 초 하나를 건넸다. 그 후에도 매일 초 하나씩을 주어서 밤에 책을 읽도록 했다. 지금으로 치면 별것 아닌 선심처럼 보이지만 초가 귀해서 대부분의 가정집에서 등잔불을 썼던 것을 감안하면 노파가 통 크게 쏜 셈이다. 그렇게 하루에 초 한 자루씩을 녹여가면서 글을 읽으면서 글 솜씨는 날로 늘어났지만 주막집 중노미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덕궁 금호문 앞으로 파수를 서러 나가게 되었다. 한양에는 경수소(警守所)라는 일종의 파출소가 곳곳에 있었다. 복처라고도 불리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한양 주민들이 차출되곤 했다. 경수소에서 번을 서는데 마침 달빛이 밝아서 책을 읽기 적당해지자 그는 품에서 서경을 꺼내서 한 장을 읽었다. 맑고 낭랑한 그의 목소리에 때 마침 윤행임이라는 관리가 지나가다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 한 밤중에 들려온 글 읽는 소리에 호기심을 느낀 그는 길을 멈추고 사람을 시켜서 그를 불러오게 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본 윤행임은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뛰어난 글 솜씨를 가진 것을 알고 깊이 감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정조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정조가 그를 궁궐로 불러서 시를 짓도록 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몇 걸음을 떼어놓기도 전에 시를 지었다. 화창한 바람은 신하들의 장막에 불고 빛나는 아침 햇살은 대궐의 붉은 문을 비추네. 걸으면서 시를 지었다는 것으로 봐서는 조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조식이 형인 조비로부터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읊어보라는 명령을 받고 시를 지었다는 칠보지시(七步之詩)를 흉내 낸 것 같다. 조식이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짓고 살아남은 것처럼 그도 멋진 시를 짓고 정조 임금을 감탄시켰다. 정조는 그를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서리로 임명했다. 사실상 발탁인사인 셈이다. 장용영은 군대였던 만큼 활쏘기와 말 타기로 시험을 봤다. 정조는 특별히 그에게만큼은 시로 대신하라고 명했다. 이후에도 그를 불러 시를 듣고 많은 상을 내려주었으며 얼마 후에는 성균관 소속의 교육 기관이었던 중부학당의 학생으로 삼았다. 장용영 서리로 임명했던 것만큼이나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임금이 아끼는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중인들의 시회인 송석원시사에서 참석하기도 했다. 정조는 그를 무척 아꼈는지 무과 시험에 합격한 그를 조령별장에 임명했다. 맨날 정승이나 판서나 봐왔던 우리들에게는 하찮은 벼슬처럼 보이지만 조령별장은 4품 관직에 해당되는 고위직이었다. 중노미 출신의 그에게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공은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공부 하나만으로 어려운 환경을 뚫고 서울대에 들어가고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들을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요즘 세상처럼 말이다. 이렇게 글 솜씨 하나로 조선 시대 성공신화를 남긴 그의 이름은 왕태였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가 감히 글을 배우는 것도 모자라서 양반들을 가르치는 게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심지어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학수처럼 말이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허드렛일을 하는 수복(守僕)이었다. 수복들은 대대로 이어져오는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성균관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무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오늘날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같은 곳 종교시설들이 치외법권 비슷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성균관과 수복들이 사는 반촌 일대는 공권력이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도둑을 잡으러 들어갔던 포도청 관리가 파직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성균관의 허드렛일을 하던 노비인 그가 어떻게 양반들을 가르치게 되었을까? 정확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성균관 유생들의 어깨 너머로 자연스럽게 글을 깨우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성균관 노비들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체득한 학문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성균관 동쪽의 송동이라는 곳에 서당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마도 그의 실력을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의 권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운 서당은 우리가 사극에서 본 것처럼 자그마한 문간방이나 대청마루에 아이들 몇 명을 모아놓고 천자문을 읽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강당이 있었고, 수업시간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경쇠라는 작은 종을 울렸다고 하니까 보통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인기 강사의 강좌에 수백 명이 몰린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실력은 대단했는지 밑에서 배운 사람들 중에서 나중에 출세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꼬장꼬장한 양반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교류했는데 개중에는 그를 우암 송시열과 비교하다가 곤혹을 치룬 선비도 있었다. 어찌되었건 성균관 노비 출신의 서당 훈장 밑에서 양반 자제들이 글을 배우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사실은 당대에는 꽤나 이슈였다. 조수삼도 추재기이에 그의 고매한 인격과 학풍을 칭찬하는 글을 남겨 놨으며 정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다. 무식하다는 이유로 양반들에게 구박과 업신여김을 당하던 민중들에게 그는 영웅이자 스타로 비춰졌을 것이다. 양반들도 정학수의 천한 신분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을 맡겼다. 오늘날로 치면 스타 강사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의 이야기는 당대에 쉼 없이 오르내렸으며 심지어는 죽은 이후에도 그에 대해서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정학수가 단순히 잘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출신성분과 뛰어난 글 솜씨가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명강사는 수억 원 대의 수입을 올리고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것은 공부를 통해 출세 혹은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양반이라면 무조건 과거를 봐야만 하고 그것이 유일한 성공이었던 조선시대에는 공부에 관한 한 오늘날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이런 과열된 열기가 성균관 수복 출신인 노비를 추켜세우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정학수의 실력과 인격이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정치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정치인들의 결정을 비판하고 시위를 벌이며, 표로 심판한다. 하지만 상하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선후기 접어들면서 관리들의 수탈과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아울러 상업이 발달하고 한양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빈민층이 대거 생겨났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울분과 한이 쌓여나갔다. 검계와 살주계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백성들의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대신 풀어준 것이 바로 의적이라고 불린 일지매였다. 부패한 관리와 악독한 부자들의 재물을 털고 매화 가지를 남겨놔서 자신이 왔다갔다는 것을 남겨놓았기 때문이 이런 별명이 붙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실존인물이었는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어느 시대에 활약했고,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 조선시대 이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도 ‘내가 옛날에 들었던 얘긴데 말이야. 일지매라는 의적이 있었데.’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중국 명나라 때 도둑질한 현장에 매화 가지를 남겨놓은 일지매라는 도둑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들어온 소설 속의 가공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오랜 세월 구전되어온 이야기들이 가공의 인물인 일지매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일지매가 실존했다는 증거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조수삼이 쓴 추재기이에는 일지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 머리가 바로 일지매는 다른 도둑들과는 달리 의협심이 있는 협객이라는 것으로 봐서는 지배층인 양반에게도 아주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추재기이를 좀 더 살펴보면 일지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탐관오리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해서 처자를 돌보지 못하거나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처마를 건너뛰고 벽을 타는 솜씨가 귀신같았다. 그래서 도둑을 맞은 집에서도 그가 왔다갔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물건을 훔친 자리에 자신의 별명인 일지매를 상징하는 붉은 매화 가지를 남겨 놨다. 자신의 소행이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조수삼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홍길주라는 학자도 자신의 책에 일지매에 관한 이야기를 남겨 놨다. 여기서 그는 일지매가 숙종 때나 효종 때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얘기한다. 효종 때 이완을 농락한 묵매도(墨梅盜)라는 도적에 관한 기록도 볼 수 있다. 묵매도는 임금이 이완 장군에게 자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을 알고 일부러 붙잡힌 후에 몰래 감옥을 나와서 도적질을 했다. 그러자 그가 도둑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완이 풀어줬다는 내용이다. 이완같이 이름난 장수를 마음껏 농락했다는 사실은 민중들에게는 두고두고 통쾌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일지매가 매화 가지를 남겨놓거나 매화가 그려진 종이를 놓고 갔다면 묵매도는 먹으로 매화를 그리고 갔다는 점만 달랐다. 따라서 동일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물론 다른 도둑들이 그의 이름을 사칭하거나 써 먹었을 수 도 있다. 아니면 사람들이 부자 집을 터는 도둑들을 보고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일지매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당대 사람들이 일지매같이 못된 부자나 권력자들을 혼내주는 의적을 갈망했다는 점이다. 이런 희망들은 일지매에 관한 전설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으며 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사실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그를 조선의 길거리 스타 반열에 올려놓을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분명 스타나 다름없는 존재나 다름없으니 다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서 현대가 되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의적에 열광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대신 없애주거나 폭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치는 탈옥범들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풍자(諷刺)의 사전적인 의미는 불합리한 세태나 권력층의 잘못을 은유적으로 비꼬는 것을 말한다. 서슬 푸른 독재정권 시절 신문의 네 컷짜리 만평은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역모죄로 몰려서 죽을 수도 있었던 조선시대에도 풍자와 해학이 존재했다. 1808년에 태어난 정수동의 본명은 정지윤이었다. 하지만, 수동이라는 호를 붙여서 정수동이라고 불렸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지냈다. 따라서 그도 당연히 역관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혼탁한 세상을 마음껏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에도 권력에 대한 비판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까닥 잘못하면 역모죄로 몰려서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천재로 알려졌다. 아무리 어려운 문장 한 번만 보면 대번에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시를 짓는 솜씨도 뛰어나서 덕분에 그는 중인 신분에 벼슬을 하지 않았음에도 김정희 같은 대학자부터 조두순 같은 권력가까지 두루 알고 지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인맥을 이용해서 벼슬 한자리를 얻으려고 했겠지만, 그는 자유로운 삶을 택했다. 그가 지은 시에서도 이런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갑갑한 격식이나 문장을 멀리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시를 썼다. 그저 붓 가는 대로 쓸 뿐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이기도 했다. 재치있고 위트 넘치는 성격 때문에 익살꾼이라는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그는 불우한 시대를 노래하는 시인이자 예술가였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영조와 정조 시대를 지나 본격적인 세도 정치시대로 접어들 때였다. 정수동은 부패한 권력이 백성을 어떻게 괴롭히고 나라를 좀먹는지 똑똑히 보았고, 나름대로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가 늘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인 아픔을 견디지 못했던 탓이리라. 하루는 세도가인 조두순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던 길이었다. 조두순의 집에 도착하자 때마침 소동이 벌어졌다. 조두순의 손자가 엽전을 삼켰던 것이다.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정수동만큼은 태연했다. “괜찮을 것이야. 할아버지가 수만 냥을 꿀꺽 삼키고도 멀쩡한데 그깟 엽전 한 닢 삼킨 게 어때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조두순 앞에서 이런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덕분에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들은 널리 퍼져 나갔다. 하나같이 제 역할을 못하는 양반과 지배층들을 비꼬고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가혹한 정치에 신음하던 백성에게 술에 취했으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정수동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후대에 기억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살아가던 시대와 권력에 배척받았다. 개인적인 삶도 불우한 경우가 많았다. 정수동 역시 자초한 가난한 삶 때문에 평생을 고통 받았다. 어린 아들이 갑자기 아팠을 때는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떠나보내야만 했다. 정수동은 죽은 아들이 너무 남루해서 저승에서 다시 돌려보내지 않을까라는 안타까움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구를 남기는 것으로 고통을 잠재웠다. 썩어가는 세상을 풍자하며 살아가던 정수동은 술에 취한 채 잠들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눈을 뜨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백대붕은 전함사(典艦司), 배를 만드는 관청의 노비라고 스스로 신분을 밝혔다. 여항문화를 이끌던 인물 대부분이 그래도 중인 신분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 처해있었던 셈이다. 태어난 시기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서 후대의 학자들은 16세기 중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후에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왕실의 열쇠를 보관하는 액정서의 사약으로 일했다고도 전해진다. 어떤 경로로 노비인 그가 글을 배우고 시를 짓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함사와 액정서에서 일을 했던 것으로 보면 국가에 예속된 공노비였으며, 관청 일을 하던 와중에 글과 문학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던 그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허균의 형인 허봉을 비롯한 양반들과도 가깝게 지냈다는 기록을 보면 자존심 강한 양반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천한 노비가 시를 잘 짓는다는 이유로 양반들과 어울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에는 허봉의 형인 허성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기도 했다. 허균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으로 봐서는 아주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가 지은 시는 단 두 편만이 남아있다. 그 중 한편인 취음(醉吟)은 술에 취한 그가 길에 누워서 자고 있다가 행인이 깨우자 시로서 대답한 것이다. 醉揷茱萸獨自娛 술에 취해서 수유를 꽂고 혼자서 즐긴다 滿山明月枕空壺 온 산에 달빛이 가득한데 나는 홀로 빈 술병을 베고 자네 傍人莫問何爲者 사람들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말게 白首風塵典艦奴 나는 바람결에 백발을 휘날리는 전함사의 종이라네 유유자적하면서도 풍류에 젖은 모습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전함사에 속한 종이라는 한탄 섞인 고백도 보인다. 만약, 그가 자신의 솜씨를 알아주는 양반들의 칭찬에 으쓱하기만 했다면 오늘날까지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잘 짓는 노비로 멈추지 않았다. 사람 대다수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주저앉을 때 그는 시로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점들이 비슷한 처지의 하층민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서 천민이지만 시를 잘 지었던 유희경과 더불어 시회를 만든다. 풍월향도라고 불린 이 시회에는 백대붕과 유희경, 정치 등 천인과 중인들이 참석했다. 미천한 신분의 백대붕 등이 양반들의 전유물로만 알려졌던 시회를 조직했다는 점은 단순히 재능을 뽐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속의 울분과 불만을 시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서로의 아픔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여항문인들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만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전함사의 종이라는 신분에 대한 울분을 시로서 승화시키고 동료끼리 그런 감정을 공유했다는 점은 예술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하지만, 풍월향도 모임은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끝나게 된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서 왜구를 막게 한다. 이일은 휘하 군관을 뽑을 때 백대붕을 고른다. 일본에 갔다 왔으니 그들을 잘 알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일을 따라 경상도로 내려간 백대붕은 상주에서 왜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는다.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한계와 울분을 시로서 씻어냈던 위대한 시인의 삶이 끝난 것이다. 그와 절친했던 유희경 역시 전쟁터에 뛰어든다. 의병을 일으킨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고, 공을 인정받아서 관직을 제수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유희경은 맥이 끊겼던 풍월향도를 다시 일으킨다. 비록 백대붕의 자리는 없었지만, 그의 뜻이 이어진 것이다.
노가재는 해동가요를 쓴 김수장의 호이자 김성기의 경정산가단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가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18세기는 여항문화(閭巷文化)가 꽃피운 시기다. 여항은 일반 백성이 사는 골목길을 뜻한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을 비롯한 중인 계층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발달했다. 김수장 역시 병조에서 서리로 일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중인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꽃을 비롯한 자연을 노래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노래를 지었으며 많은 가객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인물이다. 그는 영조 36년인 서기 1760년, 71세가 되던 해에 한양의 화개동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동료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경정산가단과 쌍벽을 이루는 가객집단인 노가재가단이 탄생한 순간이다. 김우규와 박문욱 같은 당대 최고의 가객들이 모였다. 노가재에 모인 가객들은 시인이 지은 시에 운율을 맞춰서 노래를 부르고 연주자들이 악기로 받쳐 주었다. 점잖은 양반들이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방식이었지만 여항의 예술인들은 관습과 규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래하고 연주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노가재가단은 김천택과 김성기가 활동하는 경정산가단과 함께 한양의 가곡문화를 이끌어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정산가단이 엄격하고 격식을 중시했다면 노가재가단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가객들이 선배들로부터 꾸준하게 교육을 받음으로써 솜씨가 늘어났고, 또래와의 교류를 통해 풍성한 가곡들을 만들어냈다. 1763년, 김수장은 해동가요라는 가곡집을 펴냈고, 죽을 때까지 계속 고쳐 쓴다. 그야말로 예술혼을 불태웠다고 할 수 있는데 책을 쓰고 계속 고친 것은 더 많은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를 꿈꿨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해동가요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대개 문장과 시는 책으로 만들어져서 천 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요는 불리는 순간에는 찬사를 받지만, 그때가 지나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버리고 사라져버린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여러 임금님과 관리들, 선비와 가객, 백성과 어부, 기생들은 물론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이가 지은 노래들을 수집해서 책을 펴내면서 해동가요라고 이름 지었다. 부디 여기 적혀 있는 노래들이 오랫동안 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는 노래가 지닌 풍부한 감성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이 쉽게 사라진다는 점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늙은 나이에 손수 붓을 든 것이다. 노가재가단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것도 아마 이런 뜻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삶이 풍요롭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예술은 돈이나 물질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채워준다. 건 카타가 등장하는 이퀄리브리엄의 세상은 매우 삭막하다. 문화와 예술이 모두 탄압받고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문화와 예술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지배층들이 예술가들을 천한 자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평생 노래를 해서 수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줬던 김수장조차 늘그막에 작은 초가집에서 살아야 했고, 가족들은 굶주림을 밥 먹듯이 했다고 전해진다. 배고픔에서 예술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 상황은 당사자를 힘들게 하기 마련이다. 조선의 예술가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본인과 가족 모두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불타는 예술혼을 꺾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김수장 역시 평생을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은 해동가요는 몇 가지 판본으로 만들어지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온다.
십여 년 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 배우 최민식이 오원 장승업의 연기를 맡았다. 술병을 들고 지붕에 걸터앉아서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오원 장승업의 삶과 예술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성과 실력을 자랑하는 그는 근대 회화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그가 그린 그림들은 앞선 시대의 화가들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1843년에 태어나 고아로 자라난 그는 이응헌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자랐다고 전한다. 아마도 흉년에 부모를 잃거나 버림을 받았고, 이응헌이 그런 장승업을 데려가 기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양자로 들인 건 아니고 노비로 삼을 요량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렇게 고아에서 노비로 이어질 운명은 그의 실력 덕분에 바뀌게 된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질 못했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그림솜씨가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거둔 이응헌이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이상적의 사위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역관이었던 그는 그림수집이 취미였고, 집에는 늘 화가들이 북적거렸다. 장승업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하고 직접 그리게 되었다. 아마 처음에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던 것이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승업의 그림솜씨는 곧 주인인 이응헌의 눈에 띄었다.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이응헌은 그의 손에 빗자루 대신 붓을 쥐여 주었고, 천재화가라는 소문이 한양에 퍼졌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던 화가들을 단번에 제친 그는 여기저기 불러 다녔다. 그림에 대한 한계가 없던 그는 한잔 술을 들이키고 기생의 치마폭에 그림을 그려주면서 한양을 누볐다. 그의 명성은 궁궐까지 들어갔고, 마침내 고종의 어진을 그리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천성이 묶여 있는 걸 싫어했던 그는 곧 궁궐을 나왔다. 명예와 안락한 삶이 보장된 길을 걷어 찬 그는 자유롭게 살았다. 장승업의 그림에는 그가 걸어왔고 추구했던 것들이 엿보인다. 앞선 시대의 화가들이 새로운 화풍을 만들거나 진작시켰다면 장승업은 저물어가는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그림들은 특정한 화풍이나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관념적으로 흘러가던 조선 후기 회화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것이다. 중국과 서양의 화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그의 그림은 화려하면서도 사실적이었고, 간결하면서도 농밀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것을 잃지 않은 그의 그림은 조선의 회화가 나아갈 길을 보여준 셈이다. 장승업은 마음만 먹었다면 왕의 얼굴을 그린 어진화가로서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누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잡기나 천예로 보는 양반 관료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아무리 양반이라고 해도 자신을 무시하면 그림을 그리기를 거절했고,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붓을 들어서 그림을 남겼다. 당대 한양의 백성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주막의 봉노방에서 붓을 드는 그의 모습을 종종 봤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본 어떤 사람들은 천재적인 재능을 낭비한다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과 관습에 속박 받지 않겠다는 순수한 예술혼이야말로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세도 정치의 폐해에 극에 달했다가 대원군과 고종의 통치로 이어지던 혼돈의 시기였다. 모든 것이 중심을 잃고 헤맬 때 장승업만은 중심을 잡았다. 술과 여자, 그리고 그림에 탐닉하던 그의 삶은 1897년 멈춰버린다. 그 해에 죽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어디서 무슨 이유로 눈을 감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덕분에 앞선 시대를 살아간 김홍도나 신윤복보다 오히려 삶이 베일에 가려 있다. 자신의 삶을 그림에 양보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오늘날 더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두 줄로 된 현악기인 해금은 깡깡이라고도 불렸다. 구슬픈 음색을 내는 해금은 조선시대 음악에서는 빠지지 않는 악기다. 삼현육각이라고 불리는 기본적인 악대 편성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시대에 음악은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연주되었다. 궁궐의 제사나 연회는 물론 임금이 궁 밖으로 거동하거나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에도 사용되었고, 군영에 속한 악대는 각종 군사훈련에도 참가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해금연주자로 손꼽히는 유우춘은 본래 노비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현감을 역임한 유운경이었지만 어머니가 계집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종모법이라고 해서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었다.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해도 어머니가 천한 종이었기 때문에 유우춘 역시 노비의 신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이복형이 노비 신분에서 해방해준 탓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노비의 신분을 벗어난 그는 용호영이라는 군영의 세악수(細樂手), 즉 군악병이 되었다. 노비였던 시절부터 해금을 연주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버지가 양반이었던 탓에 다른 이들처럼 심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금을 연주하는 세악수가 된 그는 최고가 되기로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3년 내내 연습을 거듭한 끝에 다섯 손가락 전부 굳은살이 생겼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노력을 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그는 한양 최고의 해금연주자라는 명성을 누린다. 거문고 연주자 철씨를 비롯한 다른 악대와 함께 연주하는 그의 해금 솜씨는 잔치에서는 빠질 수 없는 유흥거리였다. 궁궐의 연회에 불려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발해고를 쓴 실학자 유득공이 그의 생애를 기록한 한문 단편소설 ‘유우춘전’을 남길 정도로 인기와 관심을 누렸다. 하지만, 이렇게 인기와 명성이 올라갈수록 그는 깊은 고뇌와 자괴감에 빠졌다. 사람들은 해금이 내는 신기한 소리, 이를테면 벌레 우는소리나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를 듣고 신기해하지만 정작 연주를 해도 그 깊은 음색이나 소리에 대해서 몰라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명성을 누렸다고는 해도 해금을 잘 연주하는 세악수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심경은 유우춘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내가 연주하는 해금이나 거지가 연주하는 해금이나 똑같이 말총으로 활을 매고 송진을 칠한 겁니다. 내가 해금을 3년 동안 다섯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로 연습해서 지금의 경지에 도달했답니다. 다섯 손가락에 온통 못이 박혔답니다. 하지만, 실력이 좋아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외면하고 돈벌이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몇 달 동안 연습한 거지가 내는 기묘한 소리에 열광하고 환호하지요. 지금 내 명성이 온 나라에 퍼져 있지만, 그것은 단지 헛된 명성일 뿐입니다. 그중에 진정으로 해금의 연주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높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만 잠깐 듣다가 졸아버리니 나 혼자 연주하고 듣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손가락마다 굳은살이 배길 정도로 연습에 몰두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유우춘으로서는 허탈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런 세상을 외면하고 돈벌이에만 열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최고의 해금 연주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니 그의 재능과 열정이 오히려 불행을 불러온 셈이다. 차가운 현실 앞에서 냉소적이 된 그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만 해금을 연주했다. 하지만, 단 한 명, 호궁기라는 친구만이 그의 진가를 알아줬다. 그래서 유우춘은 늘 호궁기와 둘이 해금을 연주하면서 쓸쓸함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호궁기 앞에서의 연주는 아마 수많은 관객, 심지어 임금 앞에서 하는 것보다 더 설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유우춘은 다시는 해금을 연주하지 않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음악적 가치와 재능을 몰라주고 단지 해금을 잘 다루는 연주자로만 그를 대했던 세상을 향한 나름의 복수인 셈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판소리인 서편제는 느린 박자에 유연한 편이다. 반대로 동편제는 직선적이면서도 빠른 박자를 자랑한다. 우리가 전통을 얘기할 때 판소리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정작 그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그는 예술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열정이 없었다면 판소리는 오늘날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1812년 한양에서 태어난 신재효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고창으로 내려갔다. 친척이 고창현감으로 제수받자 함께 내려간 것이다. 그곳에서 약방을 차린 신재효의 아버지는 많은 돈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신재효는 이렇게 고창에서 기반을 다진 아버지 덕분에 서리 노릇을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다. 보통 서리라고 하면 가난한 백성을 쥐어짜는 악독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는 이미 부자였던 터라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 덕분에 젊은 시절부터 풍류를 즐기던 그는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판소리는 지금처럼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으로만 전해졌다. 악보나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자의 양성에 실패하거나 스승이 갑작스럽게 죽을 때는 맥이 끊길 위험성이 높았다. 신재효는 이런 판소리들의 체계를 정리하는 작업에 나섰다. 춘향가와 심청가 등 여섯 마당으로 판소리들을 나누고 일종의 대본을 만들어서 누구나 배우고 부를 수 있게 만들었다. 아울러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꾸미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역시 집안에 거처와 연습실을 마련해서 판소리 명창들을 길러냈다는 데 있다. 김세종과 정춘풍 같은 남성 판소리 명창뿐만 아니라 진채선을 비롯한 여자 판소리 명창들도 후원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더라도 광대로 취급받으며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단순한 후원자에 머문 것이 아니라 판소리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직접 노래를 작곡해서 창작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만약 신재효가 나서서 판소리를 정리하지 않고 명창들을 후원하지 않았다면 판소리 노랫가락들의 상당수는 사라졌을 것이다. 신재효의 이런 후원을 할 일 없는 부자의 취미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부유한 중인처럼 돈으로 벼슬을 사거나 한학을 공부해서 양반행세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인 판소리를 후원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예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아울러 양반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는 대신 서민들의 해학과 웃음, 그리고 풍자를 그대로 살려놓음으로써 예술적인 가치도 높였다. 비록 스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스타를 길러낸 더 중요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는 부자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서 고을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가진 재물을 풀어서 이들을 구율 했다.
김성기는 젊은 시절 상방궁인, 즉 활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아마도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가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는 없었던 재주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거문고 연주가 탁월했던 것이다. 활을 만드는 장인이 제대로 거문고를 배웠을 리 만무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열정의 소유자였다. 일하는 틈틈이 거문고를 배우던 김성기는 장안에서 이름난 거문고 선생인 왕세기를 찾아간다. 하지만, 왕세기는 김성기의 간절한 청을 무시한다. “활을 만들던 녀석이 어찌 거문고를 배운단 말이냐. 썩 물러가라!” 그렇지만 김성기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집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왕세기의 거문고 연주 소리를 듣고 따라서 연습한 것이다. 청음이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오랜 연습을 해야만 할 수 있지만, 천부적인 자질을 지니고 있던 그는 금방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세기에게 몰래 듣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다. 김성기는 펄펄 뛰는 왕세기 앞에서 그동안 몰래 들었던 것들을 연주한다. 그의 실력과 열정에 감탄한 왕세기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왕세기에게 제대로 배우면서 그의 실력은 더더욱 늘어났고, 얼마 후에는 한양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 활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거문고 연주에만 전념하게 되는데 비파와 퉁소 연주도 탁월했으며 직접 만든 연주곡은 한양에서 금방 유행되었다. 당연히 양반 사대부들의 잔치에는 빠지지 않고 초대를 받았다. 그러는 와중에 시조창을 하던 김천택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청구영언이라는 시조집을 쓴 김천택은 그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예술가에게서 나이란 장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김성기와 김천택은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고 나이를 잊은 친구로 지내기로 한다. 자연스럽게 김성기의 거문고 연주에 맞춰서 김천택이 시조창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에 동료가 모여든다. 김천택은 이렇게 모인 동료를 모아서 가단, 일종의 밴드를 구성했다. 중국의 시인 이백의 시에 나오는 경정산의 이름을 따서 경정산가단이라고 불린 이 밴드는 두 사람 외에 김수장, 김유기, 문수빈 등 당대 최고의 가객들이 모였다. 함께 모인 이들은 거문고를 비롯한 악기를 연주하고 시조창을 하면서 실력을 뽐내고 지식을 교류했다. 그렇게 늙어가던 그는 뜻밖의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경종 2년, 서기 1722년,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이 즉위하고 나서 숙빈 최씨의 아들이자 왕세제였던 연잉군의 지위는 위태로워졌다. 경종을 따르던 소론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연잉군을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지관이었던 목호룡이 노론이 연잉군을 즉위시키기 위해 경종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다. 물론 거짓이었지만 소론 세력은 이 기회를 노려서 연잉군과 노론을 탄압한다. 노론 4대신이라 일컬어지는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김창집 등이 사사되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다. 고변자인 목호룡은 동성군에 봉해지는 것은 물론 막대한 권세를 누린다. 하루아침에 권력자가 된 그는 집안에서 잔치를 열면서 김성기를 부른다. 그가 없는 잔치는 잔치가 아니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파를 연주하고 있던 김성기는 목호룡이 보낸 심부름꾼에게 호통을 쳤다. “가서 목호룡에게 전하거라. 내 나이 이제 칠십인데 어찌 너를 두려워하겠느냐? 목호룡이 고변을 잘한다 하니 나도 고변을 해서 죽여보아라.” 깜짝 놀란 목호룡의 종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세상일에 염증을 느낀 그는 한양 밖으로 나가서 작은 초가집을 짓고 낚시를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남들은 그를 하찮은 거문고 연주자로 봤지만, 그는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자리에 가기를 거부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그런 자부심과 실력이 오늘날까지 그를 기억하게 한 원동력일지 모른다.
★ 스마트 미디어 N 방송 컨텐츠 공모 ★ 방황하고 좌절하는 디지털 컨텐츠 전사들이여! 다 나에게 오라! 내가 그대들을 널리 알려주리라! 팟캐스트 방송을 너무 하고 싶은데... 기획은 너무 좋은데... 돈은 없고, 녹음실도 없고, 편집도 모르겠고... 이제 걱정 말고 기획서 한장으로 당신의 꿈에 도전해보세요. 당신의 기획력이 좋으면 팟캐스트 방송은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기획브랜드에 무조건 투자하겠습니다. 이 세상 최고의 브랜드는 바로 당신입니다 지금 팟캐스트 방송 기획서를 Smartmedian7@gmail.com로 보내주세요. 기획서 형식은 자유입니다. 당신의 꿈이 팟캐스트 방송으로 이루어집니다. 소심하면 꿈이 사라집니다. 지금 바로 도전하세요. 당신의 멘토 스마트 미디어 N이 있습니다.
★스마트 미디어 N 프로그램 소개★ 미디어의 새로운 진화를 꿈꾸는 스마트 미디어 앤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소개 합니다. 딱 한놈만 패는 정치시사의 신넘버3 냉정한 게임덕후 직썰러들의 게임리뷰 썰겜 한 주간에 국제이슈를 정리하는 글로벌 뉴스 박길명의 W2 영화를 비틀어 보고 재해석해 본다. 귀로 듣는 영화 극장, 전창걸의 부귀영화 어려운 역사를 쉽게 이해하고 지식을 키워주는 역사 추리소설 조선연예인 비사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청취 바랍니다.
그는 한낮 광대였다. 소를 잡는 백정보다 못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들을 보면 하나같이 못 생기고 초라했다고 나와 있다. 입이 하도 커서 주먹이 다 들어갈 정도였는데 달문은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서 그를 기억하는 양반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의 이름을 딴 달문가라는 노래가 지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미천하고 못 생겼지만, 당대 아니, 조선 후기 최고의 광대라는 찬사와 기억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못 생긴 외모를 오히려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넉살 좋은 성격과 뛰어난 재주 때문이었다. 18세기는 한양의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각종 놀이문화도 활기를 띠던 시기였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나 송파산대놀이처럼 군중을 상대로 한 인형극이나 탈춤 공연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달문은 비록 못생겼지만, 재주가 뛰어나서 인형을 잘 다루는 것은 물론 철괴무나 팔풍무 같은 탈춤에도 능했다. 팔풍무는 단순히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공중제비를 돌거나 몸을 뒤집는 등 땅재주와 유사하다. 따라서 남사당패의 광대들이 하는 땅재주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주를 넘고 춤을 추는 와중에서도 쉴 새 없이 재담을 늘어놓거나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능력을 보여줬다. 남의 흉내도 잘 내서 곧잘 웃음을 선사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18세기 한양을 누빈 길거리 스타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한양에서 제법 논다고 하는 패거리들은 달문을 모시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그가 놀이판에 끼느냐 안 끼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관심이 달라졌다고 하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이었다면 유재석이나 강호동에 버금가는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누리는 것은 물론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광대인 달문은 집조차 없어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물론 그를 모셔가려고 줄을 섰겠지만 어쨌든 당대 최고의 광대가 머물 집이 없다는 사실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그의 재주에 감탄하는 양반들조차 근본이 없음을 천하게 여기고 손가락질했다. 집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낙천적이고 선량했던 그는 자신의 못 생긴 외모 때문에 아무도 시집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얘기하고 다녔다. 청계천의 거지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러다 주변의 소개로 약방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주인이 물건 값을 잊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집도 절도 없는 그가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달문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물건 값을 치르고 약방을 그만두었다. 며칠 후 친구가 찾아와서 급하게 쓰느라 돈을 가져갔다면서 돌려주자 약방주인은 그때야 달문이 누명을 쓰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달문은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러 온 약방주인에게 오히려 번거롭게 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후 달문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중개해주는 거간꾼을 하거나 기생의 뒤를 봐주는 조방군, 즉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예술가였던 그에게는 하루하루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은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결국, 하던 일을 때려치운 달문은 조선 팔도를 유람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며 인기를 누렸지만, 근본도 없는 떠돌이 광대라는 손가락질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춤을 추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관습과 신분제의 틀에 갇혀 있던 조선에서는 불온하고 근본 없는 광대에 불과했다. 추재기이에서는 노총각인 그를 나라에서 결혼을 시켜주자 은혜에 감읍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눈물을 흘렸다고는 해도 정말 고마워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낱 못 생긴 광대에 불과했지만,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으니까 말이다.
이언진은 본래 역관출신이다. 조선시대 역관들은 대부분 중인 집안의 가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언진의 집안 역시 대대로 역관 노릇을 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그도 사역원에서 치르는 역과에 합격하고 자연스럽게 역관이 되었는데 왜 통사, 즉 일본어 통역으로 일했다. 하지만, 남달리 총명했던 이언진은 기억력이 뛰어나서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격발(擊鉢), 즉 밥그릇을 한번 때리는 동안 시를 완성할 정도로 순발력이 뛰어났다. 글씨도 매우 단정해서 마치 활자로 인쇄한 것 같았는데 틀린 곳을 찾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천재라는 뜻이다. 왜 통사였던 그는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천재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벌떼같이 몰려와서 시를 요구했는데 수백, 혹은 수천 건에 이르렀다. 통신사와 호송하던 관리들이 붓을 들고 응하려고 해도 서로 먼저 써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곤경을 겪기 일쑤였다. 이언진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글을 잘 쓴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무려 오백 개나 되는 부채를 내밀면서 시를 써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이언진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그 자리에서 먹을 갈면서 시를 읊조리고 붓을 들어서 부채에 적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오백 개의 부채에 시를 쓰자 일본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천재를 시험해볼 요량이었는지 또다시 부채 오백 개를 가지고 와서는 조금 전 썼던 오백 개의 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새로 쓰는 것도 아니고 같은 시를 다시 써달라고 했으니 어쩌면 골탕을 먹이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언진은 빙그레 웃더니 붓을 들고 아까 썼던 시들을 중얼거리면서 써나갔다. 부채의 시를 맞춰보던 일본인들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것을 보고는 대경 질색했다. 혀를 내두른 일본인들이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서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이언진이었지만 정작 조국에서는 높이 쓰이지 못했다. 중인이라는 신분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가 아무리 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쓴다고 해도 결국은 역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날개를 펼치지 못한 재능은 병마로 변했다. 병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참담함이 그를 꺾었을 것이다. 마음의 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그는 결국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언진은 죽기 직전 자신이 쓴 시를 모은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불을 질렀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남겨두어도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누가 나 이언진을 기억하겠는가?”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아내가 급하게 불을 껐지만, 책 대부분이 재로 변한 다음이었다. 아내가 불을 끄고 책들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언진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간직한 몇 개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세상이 그의 재능에 관심을 기울였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붓 한 자루로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했던 천재 시인 이언진은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시가 적힌 책을 불길 속에 던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늘을 꿰뚫는 비범한 재능조차 넘어가지 못하는 신분의 굴레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조선이 그에게 마음껏 시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면 우리는 이언진이라는 위대한 시인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명확하게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 얘기는 그의 태어남과 죽음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대략 18세기 초반에 태어나서 후반쯤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도화서 소속으로 국가의 녹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과는 달리 그가 어디서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솜씨만큼은 일품이었는지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뛰어난 그림솜씨는 그의 삶을 편안하고 윤택하게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살기로 마음만 먹었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세상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이름인 북(北)을 나눠서 칠칠(七七)이라고 스스로 불렀고, 호생자(毫生館), 즉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자조적인 뜻을 지닌 호를 지었다. 당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렀다. 최북의 기행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했다. 금강산의 구룡연을 구경하고 잔뜩 술을 마시고는 ‘천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라며 연못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함께 있던 일행이 구해주어서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밖에도 어느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는 청을 거절한 후, 협박을 당하자 남이 손대기 전에 내가 스스로 손을 대야겠다며 자신의 한쪽 눈을 스스로 찌른 일화도 잘 알려졌다. 늘 술에 취해있어서 하루에도 대여섯 되의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아예 술을 파는 사람이 집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럼 최북은 책과 종이들로 술값을 치렀다. 이렇게 술을 마시느라 가산을 탕진하자 전국을 떠돌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가는 곳마다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때에도 괴팍한 성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림 값이 적다고 생각되면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고 해도 찢어버렸다. 반대로 비싼 값을 주면 오히려 그림을 볼 줄 모른다고 타박을 주었다. 그의 그림을 사려고 했던 이들이 대부분 양반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런 행동은 대단히 무례하고 오만하게 비쳤을 것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이나 술주정뱅이로 여겼다. 하지만, 시를 잘 지었으며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성호 이익이 송별시를 지어주었다는 점을 봐서는 미친 화가라는 당대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옥죄는 현실을 잊고자 술과 광기로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며 학문을 숭상했던 조선에서는 최북같이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화가는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그의 예술은 당대의 그 어떤 양반들보다 오래 기억되고 있다. 붓이 아닌 손가락 혹은 손톱으로 그린 풍설야귀인도를 보면 헝클어지고 불타오르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어두운 밤,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옆을 지나 깊은 계곡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은 작게 그려져 있고, 초가집과 싸리담장은 물론 길옆의 마른 나무들 모두 뒤틀리고 기울어져 있다. 조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최북의 비명이 들린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활기를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웠다. 새로운 문화는 양반들의 사랑방이 아니라 여항(閭巷), 즉 백성이 사는 골목길에서 피어났다. 그 중심에는 양반이 아니라 중인과 백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배층들은 여전히 낡은 유교 이념을 내세워서 새로운 문화를 외면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최북은 조선과 중국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도 다르니 마땅히 조선의 화가는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쩌면 그의 광기는 변화를 거부하는 세상에 대한 외침이자 경고였을 수도 있다. 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알려 지지 않는다. 일설에는 추운 겨울날, 술에 취해서 길에 쓰러져 잠들었다가 그대로 얼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광기에 찬 불우한 삶이 멈춘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조선시대 무당은 백성들의 의사와 멘토 역할을 해줬던 친근한 존재다. 당장 나라에서도 흉년이 들면 무당이나 장님으로 하여금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제사를 지내게 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점을 치고 있으니 조선시대에는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백성들도 주변에 해괴한 일이 벌어지거나 가족이 갑자기 아프면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했다. 하지만 나쁜 혼령이 달라붙었다면 굿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오면 귀신 잡는 퇴마사 엄 도인이 나섰다. 강원도 영월 출신의 그는 본래 무사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천문을 읽고 풍수에 해박했으며 관상도 잘 봤다고 한다. 한 마디로 무사라기보다는 역술인이자 지관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런 재주들을 모두 압도하는 진짜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귀신을 잡는 것이었다. 정체모를 귀신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백성들은 그에게 SOS를 치면 엄 도인은 관을 쓰고 도복을 입은 채 현장에 출동했다. 그리고 칼을 휘둘러서 귀신과 싸웠는데 궁지에 몰린 귀신을 항아리 속에 몰아넣고 붉은 부적으로 입구를 봉해버렸다. 그리고는 먼 바다에 던져버렸다. 잔챙이 귀신들은 귀찮게 항아리 안에 넣고 봉하지 않고 그냥 씹어 먹어버렸다. 그러면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설명을 들으면 나이든 분들은 어디서 봤더라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80년대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홍콩영화인 ‘강시선생’이나 ‘영환도사’에서 나온 퇴마사가 딱 이런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귀신의 대표 격인 장화 홍련은 단지 놀래 켜서 죽였을 뿐이지 절대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그리고 배짱 두둑한 사람을 만나면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하고 조용히 사라질 뿐이었다. 귀신이 되었다고 사람을 해치거나 바로 복수를 하는 대신 공권력에 호소하는 준법정신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간혹 나쁜 귀신이 나타난다고 해도 무당이 출동해서 굿을 하면서 사연을 들어주고 달래주면 물러갔다. 하지만 엄 도인은 칼을 들고 나타나서 귀신과 싸웠고, 씹어 먹기까지 했다. 갑자기 귀신들이 사나워지기라고 한 걸까? 아니면 중국에서 나쁜 귀신들이 건너왔던 것일까? 그것도 그렇지만 강원도 영월이라는 외딴 곳에 살던 엄 도인은 청나라로 유학을 갔다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어디서 이런 퇴마술을 배웠을까?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아쉽게도 단서가 될 만한 기록들은 보이지 않는다. 엄 도인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있는 추재기이는 조수삼이 젊은 시절 직접 봤거나 소문으로 들은 것들만 엄선했다. 따라서 엄 도인 역시 한양에서 활약을 했거나 혹은 그 소문이 흘러 흘러 조수삼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낯선 복장을 하고 칼을 휘두르며 귀신과 싸우던 엄 도인은 아마도 몹시 색다르게 보였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큰 사랑을 받았다. 기괴하고 과격해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귀신들을 물리쳐주는 고마운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책은 귀한 물품이자 재산이었다. 아울러 교보문고 같은 서점이나 yes24 같은 온라인 서점도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원하는 책을 손에 넣으려면 반드시 중개상이 필요했다. 서쾌, 혹은 책쾌라고 불리는 서적 중개상들은 언뜻 생각하기에 예술가나 스타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책쾌는 단순한 중개상이 아니었다. 관련된 정보들이 제한되어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 상태는 어떤지를 알고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한문을 알고 있어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책을 팔고 싶어 하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을 두루 꿰뚫는 인맥과 대인관계도 필수적이었다.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 지식을 사고파는 존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수많은 책쾌들이 활동했지만 조신선의 존재는 개중에도 두드러졌다.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을 비롯한 조수삼의 추재기이에 그의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한양 백성 중에도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일단 그의 나이나 고향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언제부터 책쾌 노릇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해만 뜨면 한양을 누비고 다녔는데 항상 책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사람들과 오랫동안 어울려 지낸 탓에 넉살도 좋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누가 말을 붙여도 꿀리지 않았다. 그리고 술을 좋아해서 항상 책을 사고팔아서 이익이 남으면 주막으로 달려가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짚신과 베옷으로 사시사철을 보냈다고 하니, 책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로 책을 팔았는데 선비뿐만 아니라 글을 배우는 학동이나 마부까지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폭넓은 고객을 상대하려면 그들이 어떤 책을 원하고 그것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두 꿰뚫어야만 했다. 실제로 그가 책을 사려는 했던 선비와 나눈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책의 내용은 물론 판본과 발행 시기까지 줄줄이 얘기했다. 평생 책을 읽은 선비와 책을 주제로 막힘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박학다식함을 자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나이와 고향은 물론 어디에 사는지조차 몰랐다고 하는 걸 보면 온종일 책을 구하고 팔고 술을 마셨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내일은 누구에게 책을 사고 어떤 사람에게 넘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기이하게 비쳤을 것이다. 누군가 왜 그렇게 책을 고생스럽게 사고파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비록 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누가 무슨 책을 언제부터 가졌는지 잘 알고 있다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이고 누가 언제 썼는지도 꿰뚫고 있지. 그러니까 이 세상의 책은 모두 내 책이란 말이오. 세상의 책이 모두 사라진다면 나는 책을 팔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지도 못했을 것이오. 이는 하늘이 나에게 점지해준 일이니 죽을 때까지 책을 사고팔 생각이요.” 책에 대한 관능적인 집착과 광기가 느껴진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하지만, 조신선은 분명히 책을 사고파는 것을 상행위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책을 사고파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영조 47년인 서기 1771년, 이렇게 맹활약을 하던 조신선을 비롯한 책쾌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영조가 불온서적들을 유통한다는 명목으로 책쾌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체포된 책쾌들이 사형에 처하고 가족들이 모두 유배를 떠난 와중에 조신선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하지만, 몇 해 뒤 다시 나타난 그는 여전히 책을 가슴에 품고 달렸다. 죽음조차 책을 향한 그의 뜀박질을 막지 못한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해질수록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 관심을 끊게 된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사람이 쓰러지거나 강도를 당해도 모른 척 하기 일쑤다. 도와줘봤자 번거롭기만 하고 고맙다는 소리를 못 들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성 밖 길거리에 시신이 버려져있는데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아서 나중에 알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행인들이 모른 척 한 이유는 간단했다. 신고하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귀찮아지거나 재수가 없으면 용의자로 찍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눈뜨고 못 보는 의협심에 불타는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추재기이에는 서강 사람인 김오흥을 대표적인 협객으로 꼽았다. 오늘날에는 그냥 한강이라고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경강이라고 불렀다. 배로 운반된 세곡들을 비롯한 각종 물자들이 이곳을 통해서 한양으로 유입되었다. 조선후기 접어들면서 한양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경강을 통한 물자의 유입도 크게 늘어났다. 경강 중에서도 포구들이 있고 물자가 하역되는 곳을 오강이라고 불렀는데 용산과 마포, 서강, 양화진, 그리고 한강진이었다. 그 밖에 노량진이나 서빙고, 송파등도 배들이 제법 드나들었다. 이에 발맞춰서 강변에는 포구들이 늘어나고 물건을 사들이는 객주, 그리고 들어온 물건들을 중개해주는 거간꾼과 중간도매상격인 중도아들이 드나들었다. 배를 몰거나 부려진 짐을 나르는 일꾼들도 모여들었는데 각지에서 올라온 유랑민들이 그 역할을 떠맡았다. 고향을 떠난 가난한 이들이 모여든 강변은 슬럼화가 되어버렸다. 타 지역 사람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을 강대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천시했다. 무식하고 무례하다는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김오흥만큼은 달랐다. 그는 오늘날 서강대교 북단에 위치한 서강에서 배를 모는 사람이었다. 뱃사람을 천시하는 조선시대 관습으로는 제일 밑바닥 인생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완력이 세고 배짱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그에 걸 맞는 일화가 전해져온다. 바로 훈련도감 별영창에 딸린 읍청루라는 정자의 처마에 거꾸로 매달려서 기와 골에 발을 걸고 나아갔다는 것이다. 발끝으로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움직이려면 적지 않는 완력이 필요하고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압박감을 견디는 배짱도 있어야만 했다. 힘만 좋은 게 아니라 민첩하기도 했는데 제비나 참새에 비유한 것을 보면 제법 날쌘 모양이었다. 이종격투기의 최강자라고 불리는 효도르의 파워에 인간탄환이라고 불리는 우사인 볼트의 민첩함을 갖췄다고 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마음만 먹었으면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서 먹고 살수도 있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김오흥은 강대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면 나서서 뜯어말리는 역할을 했는데 주로 힘없고 약한 사람 편을 들었다. 그러다 일이 커지면 힘을 쓴 모양인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도 제법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굽히지 않았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김오흥의 활약 덕분에 강대, 특히 서강에서는 힘 있는 사람이 함부로 행패를 부리거나 나쁜 짓을 하지 못했다. 얼마든지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를 자처한 것이다. 무뢰배와 왈자와는 다른 협객이나 의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에게는 정의의 사도이자 스타로 비춰졌으리라.
여기 또 한명의 조방꾼이 있다. 앞서 소개한 최가가 신의와 침묵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면 그는 또 다른 측면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역시 최가처럼 기생들의 기둥 서방인 조방꾼이다. 단순한 조방꾼이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불렸던 것으로 봐서는 상당한 수완가였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의 단골손님에게 은밀하게 얘기했다. “제가 이번에 정말 아름다운 기생을 데려왔습니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할 만한데 열 냥만 내시면 그 기생과 달콤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중배의 얘기에 귀가 솔깃한 손님은 냉큼 열 냥을 내놨다. 그리고 약속한 날,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 기방에 찾아갔다. 과연 이중배의 말대로 은은한 등잔불이 켜진 방 안에는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고도 아홉 명의손님들이 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기방은 돈만 있다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우스꽝스러운 기방만의 예법을 따라야만 했는데 예를 들면 양반집 자제라고 해도 기방에 드나들 때는 그 집 청지기라고 둘러대야만 했다. 체면과 예법이 쾌락의 현장인 기방까지 파고든 셈이다. 따라서 선금 열 냥을 낸 손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다른 방해꾼들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얄밉게도 다른 손님들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조방꾼 이중배도 계속 드나들면서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본 손님은 그가 다른 사람을 쫓아내고 싶어 하지만 기방의 예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렇게 기묘한 대치상황이 밤새 이어지고 새벽이 밝아왔다. 그러자 이중배는 싸구려 술과 나물을 대접하고는 날이 밝았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체면 때문에 거금 열 냥을 날린 손님은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사자들은 꿈에도 몰랐지만 사실 거기 모인 열 명의 손님들은 모두 이중배가 열 냥씩 돈을 받은 손님들이었다. 조방꾼으로 오랫동안 일했던 그는 기방의 풍습을 이용해서 무려 백 냥이나 되는 돈을 갈취한 것이다. 이중배의 사기극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중배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경력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사기극을 꾸몄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백 냥이라는 돈도 조방군들의 우두머리라는 얘기를 듣는 그에게는 거금은 아니었으리라. 어쨌든 그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어떻게 보면 범죄나 다름없는 짓인데 사람들은 왜 비난 대신 칭찬을 하면서 이야기를 퍼트렸을까? 기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오입쟁이라고 불렸다. 주로 독점유통으로 큰돈을 번 경강상인들이나 역관 같은 중인들, 그리고 귀족화된 양반들인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자제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백성들은 점점 가혹해지는 수탈과 거듭된 흉년에 큰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많은 돈을 번 상인들과 권력을 이용해서 부를 축재한 경화세족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따라서 18세기와 19세기의 한양은 화려한 유흥문화가 꽃을 피우는 동시에 길거리에 굶주리는 사람이 구걸을 하는 극과 극의 도시였다. 하루 한 끼를 먹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 열 냥이라는 거금을 아낌없이 쓰는 부자들이 더 없이 미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배의 사기행각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대신 전설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점잖았다는 선입견이 있다. 공자와 맹자를 읽고, 유학을 생활의 도리로 삼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양반들도 남자였다. 여자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양반들이 점잔만 빼고 살았을까? 조방꾼이라는 직업만 봐도 이 얘기가 얼마나 거짓말인지 알 수 있다. 조방꾼은 기생들의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이다. 단순히 뒤를 봐주는 정도가 아니라 손님과 연결시켜주는 중개인과 보디가드 역할까지 떠맡았다. 대전별감이나 의금부 나장 같이 권력과 가까운 이들이 주로 조방꾼을 맡았지만 나중에는 다른 직업 없이 조방꾼만을 전문적으로 맡는 이들이 생겨났다. 아울러 규모도 커져서 한 두 명이 아닌 수십 명의 기생을 관리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오늘날의 보도방 업주과 유사한 일을 했던 셈이다. 차이점이라면 현대의 보도방 업주들의 처벌과 비난의 대상이라면 조선시대 조방꾼들은 유흥문화를 주도했으며 당당한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당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놀이가 바로 술과 기생들과 어울리는 것이고, 외도라는 인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활보하던 조방꾼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벙어리 조방꾼 최가였다. 말로 먹고 살아야 하는 직업인 조방꾼이 벙어리라니 쉽게 믿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진짜 벙어리가 아니라 입이 무거운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추재기이에서 묘사된 모습을 보면 실제 벙어리가 맞는 듯하다. 벙어리이긴 하지만 그는 관기와 사창들을 모두 부리는 인물로 묘사된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보통 관직이 없는 경우라고 해도 어른에게는 관례상 생원이라고 불러주는 경우가 많았다. 영조시대 활약했던 책쾌 조생도 다들 조생원, 줄여서 조생이라고 불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는 최씨 혹은 최가라고 했던 것으로 봐서는 일찌감치 조방꾼으로 나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말은 비록 못하지만 허우대가 멀쩡했고 손짓발짓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이렇게 되자 말을 못한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입이 무거워야 했던 조방꾼으로서 큰 장점이 되었다. 단순히 입만 무거웠던 것이 아니라 신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손님의 부탁을 받으면 어떻게든 성사시켜줬고, 그 일에 대해서는 어디 가서도 발설하지 않았으니 싫어할 사람들이 어디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많은 돈을 벌어서 옷을 잘 차려입고 부자 집 도령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으니 단연코 사람들 눈에 띄었다. 성을 사고파는 것이 불법이 된 요즘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범죄자였지만 당시에는 화류계를 주도하는 인물이었다. 거기다 벙어리라는 핸디캡을 딛고 많은 돈까지 벌었으니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단순히 입이 무겁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만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둥글게 해서 서쪽을 바라봤으며 길을 가다 사람들을 만나면 꽃가지를 잡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가 추측하기 바빴다고 한다. 후자는 아마 꽃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두 가지 사례뿐이긴 하지만 의사소통치고는 낭만적으로 보인다. 비록 벙어리라고 해도 입이 무겁고 신의가 있으며 낭만적인 사내였으니 비록 직업이 조방꾼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싫어할 리가 없었으리라.
정명섭 작가의 신나는 조선 연예인 탐구생활! 이제 시작합니다. 출처 음악 : 국립국악원 국악 아카이브
스마트 미디어 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감, 소통, 공유, 창조의 미디어 그룹입니다. 스마트 기반의 콘텐츠를 서로 공유해서 사람을 존중하는 콘텐츠, 사람을 위한 살아있는 언론 미디어를 만들겠습니다. 외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개방적으로 소통하는 열린 스마트 미디어를 만들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